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그니 May 27. 2022

손님 구별법- 은폐된 테이블의 주인

불쑥 지폐가 눈앞에 나타났다. 인자한 세종대왕도 아니고, 근엄한 율곡 이이 선생도 아닌 자애로운 신사임당이 그려진 우리나라 최고액권... 당황스럽다. 다시 물어봐도 결과는 뻔하지만 그냥 한마디 꺼내본다. “혹시 카드는 없을까요” “있기는 한데... 그냥 현금으로 계산해 주세요.” “...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거스름돈으로 주기 위한 현금을 빌리기 위해 편의점이나 옆 카페로 달려간다. 가면서 속으로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누가 현금이 좋다고 했어!’

우리 카페에는 없는 게 세 가지 있다. 커피머신, 유아용 의자 그리고 현금이다. 커피머신과 유아용 의자는 없어도 개의치 않는다. 커피머신이 없으면 손발이 고생하겠지만 드립으로 하면 된다. 애기들이 오면 약간 편한 의자로 양해를 구한다. 불편은 하겠지만 큰 불평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금은 다르다. 거스름돈을 안 받고 갈 사람은 없으니까. 카드가 아닌 지폐를 내는 손님이 있으면 영락없이 몸이 움직여야 한다. 

카페를 시작할 때 했던 생각 중 하나는 ‘요즘 현금 내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다 카드 쓰지’ 하는 것이었다. 돈을 분류하는 통을 따로 마련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실제로 나도 지갑에 현금을 넣고 다니는 일이 별로 없다. 사실 가진 돈이 별로 없어서인 이유가 더 크기는 하다. 현금만 받는 가게에 대한 선입견도 크게 작용했다.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현찰을 내면 10% 깎아준다거나 카드 결제를 하면 부가가치세 10%를 더 받는다는 곳은 대부분 세금 내기 싫어하는 곳이라는 것을. 세원이 드러나는 것도 달갑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우리도 세금을 반가워하지는 않는다. 적게 낼수록 좋다. 그렇다고 편법을 쓰기는 싫다. 내가 하고 싶어도 아내와 아들이 원하지 않는다. 사장님과 상속자가 싫다고 하니 노예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현금 아닌 카드만 쓸 것이라는 선입견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은 카드를 쓰지만 한 달에 적어도 한 두 번은 꼭 현금을 내는 손님들이 찾아온다. 이중 가장 많은 게 신사임당을 뵙는 경우. 이는 곧 거스름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현금으로 계산하려는 손님에게 카드로 해 주시면 안 되겠냐고 부탁을 하곤 한다. 이때 대부분의 손님들은 "일부러 현금드렸는데..." 하면서 돈을 지갑에 넣고 카드를 다시 꺼낸다. 이때는 정말 눈물 나게 고맙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했던가. 꼭 현금을 고집하는 손님이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본다. 혹시 불륜 커플, 조금 고상하게 '로맨스그레이'? 대놓고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물론 현금을 낸다고 모두 사시를 뜨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이렇게 단정 짓는 부류는 이런 커플들이다.  

수상한 커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자리. 앞에 서 있는 벽 때문에 다른 손님들의 시선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우선 외양이 50대 이상의 연륜을 자랑하며 복장도 놀러 온 사람 같지 않다.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지만 뭔가 불편하고 격식 있는 분위기를 풍긴다. 여자 손님이라면 한껏 뽐을 낸 티가 난다. 하이힐을 신고 치마를 입는 경우가 대부분. 간혹 미니스커트도 등장한다. 그냥 커피 한잔 하러 온 손님들의 복장과는 확실히 다르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중얼거린다. '꼭 저러고 다녀야 하나.'

앉는 자리는 정해져 있다. 두리번두리번 거리다 꼭 차지하는 곳이 카페 구석에 만들어진 벽 뒤의 2인용 테이블. 벽에 가려져 있는 탓에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최대한 보호를 받는 자리다. 순서도 비슷하다. 여성이 먼저 테이블에 앉고 남성은 자리에 가지도 않은 채 음료를 시킨다. 메뉴판도 보지 않는다. 그냥 무조건 커피류 혹은 플러스 디저트. 이후 화장실을 가거나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사진은 절대 사절이다. 보통 젊은 커플이나 부부는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열심히 '찰칵 모드'로 변신한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커플은 자신들 주변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나는 것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치 절대 사진에 찍히면 안 되는 스파이나 범죄자처럼. 얼굴을 정반대 방향으로 돌리거나 머리를 만지는 척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아내가 말한다. “저런 것들은 콱 사진을 박고 추적해서 집에 알려줘야 한다”라고. 생각해 본다. 과연 모든 사실을 다 까발리는 것이 진정 좋은 일일까. 김훈 작가는 수필집 '라면을 끓이며'에서 이렇게 말한다. “행정력을 동원해서 러브호텔 주차장의 비닐 커튼을 걷어내라는 분노의 함성이 일었다. 이것은 될 일이 아니다. 호텔 주차장 입구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가려주는 이 비닐 커튼은 그 신도시의 평화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다. 이 커튼을 걷어내면 가정은 거덜 나고 불화는 증폭된다. 비닐 커튼은 물론 위선과 허위의 장치다. 세상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위선일 때가 많다.”

불륜 커플이라 매도하지 말라며 볼멘소리를 하는 측도 있을 것이다. 이들의 항변을 요약하면 이렇다. “남녀가 만나 애틋함을 나누는 게 어찌 잘못이냐." 어느 드라마 남자 주인공은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라고 외치기까지 하지 않았나. 어디 드라마뿐이랴. ”러브는 죄가 없다.” 김훈 작가의 말이다. 

이런 얘기를 내가 한다면 졸지에 노숙자가 되거나 회사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 처지가 될 게 뻔하다. 우리 집 명의는 아내 이름으로 돼 있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하긴 돈 없고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시커먼 놈을 누가 볼까. 그래도 한 눈 팔지 말아야 편하게 살 수 있다. 조심 또 조심해야 할 일이다.

이전 16화 첫사랑, 짝사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