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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Sep 18. 2023

첫사랑, 짝사랑

자꾸 눈길이 갔다. 보고 또 보고 다른 곳을 바라보다 다시 돌아보고.... 눈이 떠나질 않았다. 말을 한번 걸어볼까. ‘혹시 CMY 아니냐고’고.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시곗바늘이 조금 더 돌아간 후 모든 게 분명해졌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40년도 훨씬 지난 시간인데 내가 알아볼 리 없지. 그 손님은 많아야 40대나 됐을까. 시간의 간극이 너무도 크다. 아닐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을 간과하고 잠시나마 상상의 나래를 펼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원수는 옷이었다. 마치 치파오를 연상케 하는 푸른색 원피스. 얼굴은 약간 희미하지만 내 기억 속에 선명히 자리 잡은 색상의 치마. 내가 첫사랑이라 굳건히 믿고 있는 CHK를 떠올릴 때 반드시 소환되는 옷이다.  

나에게 타임머신을 선사했던 손님이 들어온 것은 오후 늦게. 더 이상 올 사람이 없다면 카페 문을 닫고 가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이 느긋하게 창문으로 걸어오던 바로 그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같이 온 사람은 없었다. 오자마자 2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아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혼자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어릴 적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 시선은 돌아가지 않았다.

손님이 일어선다. 찻잔을 가져다주며 말한다. "잘 쉬다 갑니다." 대답을 하고 싶다. "추억을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만 그렇게 답할 뿐 입으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안녕히 가세요.” 추억의 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첫사랑에 가슴앓이를 했던 시기는 중학교 1학년 아주 짧게 과외를 할 때였다. 그 나이에 그게 무슨 첫사랑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냥 철부지의 경험일 뿐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건 말건 상관없다. 그녀를 만난 후 지금까지 잊지를 못했으니까. 순간순간 생각나고 문뜩문뜩 그리워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첫눈에 반한 것은 아니다. ‘보는 순간 반해버렸다’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하물며 아내를 만나 연애를 할 때도 반년 넘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지금의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그냥 좋은 것이라고 믿은 탓이다.

CHK는 좀 남달랐다. 말이 많이 적었다. 대화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과외를 하던 서울 잠실 5단지 고층아파트에서 1단지까지 약 20여분 동안 항상 혼자 다녔다. 나도 같은 단지에 살았기에 그녀가 먼저 가고 내가 뒤따라가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문뜩 깨달았다. 내가 CHK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속에 품고 있다는 것을. 무조건 예뻤다. 다른 사람과 섞어 놔도 내 눈에는 그녀만 보였다. 물론 제 눈에 안경일 수 있다. ‘여자 보는 눈이 참 독특하다’는 평을 자주 듣는 편이기에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얘기를 할 기회는 언제든 있었다. 집에 같이 가면서 대호를 하면 그만이다. 핑계도 좋지 않은가. “같은 방향이니 같이 가자.” 그 한마디를 더 이상 못 만날 때까지 못했다. 두고두고 후회한다. 쑥스러워서, 내 마음을 들키면 어떻게 하나, 같이 다니기 싫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입 한번 떼지를 못했다.

기회가 있기는 했다. 왜 그랬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항상 뒤따라가다가 어쩐 일인지 내가 앞서 가게 된 적이 있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그 아이가 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자동차 뒤에 숨어서 기다렸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CHK가 내 옆을 지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나를 발견한 후 말을 걸었다. “얘, 너 여기서 뭐 하니.” 차마 너를 기다렸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를 기다린다고 하자 “잘 가” 한마디를 던지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쉬웠다. 같이 가자고 할걸. 그렇게 CHK는 사라졌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와의 대화는 이것이 전부다.

짧은 과외를 그만두고 다시 만날 기회는 영영 없었다. 학교를 갈 때 혹시 정류장에 있지 않을까 일찍 나가서 30분 이상 기다려 본 적도 있고, 힐 일도 없는데 괜히 CHK 집(어디 사는지는 알고 있었다) 앞에서 서성이다 저녁이 다돼서야 돌아가곤 했다. 지금 같으면 스토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 다시는, 어쩌면 영원히 그럴 것이다.

남자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을 꼽으라고 한다면 상당수가 황순원의 '소나기'를 꼽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아련하고 애틋한 그 소설을 읽고 생각할 때마다 항상 CHK를 생각한다. 오래전 영화 엽기적인 그대' 보았을 때도, 옛 감성으로 충만했던 '건축학 개론'을 볼 때도 항상 치파오를 입은 그 아이가 떠오른다. 첫사랑이란 짝사랑이란 그만큼 애틋한가 보다.

지금 첫사랑을 만나길 바라지는 않는다. 나이 들고 삶에 찌든 모습을 보기는 싫다. 어렸을 때 심어주었던 그 감성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옆에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내 아내와 아들이 있다. 30년을 전우애로  희로애락을 함께한 첫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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