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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그니 Jun 06. 2022

그림 그리고 선입견

나는 카페 노예다(8)

우리 카페에는 그림들이 많다. 꽃밭에 앉아 있는 사자, 정자와 폭포가 있는 산, 물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날치, 빨간 풍선들을 한가득 등에 달고 하늘을 날고 있는 돼지... 모두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것들이다. 당연하다. 누구 것을 베낀 게 아니라 직접 상상하고 그린 것이니. 작가 사인이 들어있는 작품도 있다. 갤러리 카페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분위기 정도는 난다. 모두 사장인 아내의 작품이다. 전문 작가는 아니다. 미술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아마추어 작가다. 그래도 작품을 사고 싶다는 손님이 있다. 그렇게 판 작품이 두 점이다. 한 젊은 부부, 또는 애인 사이로 추정되는 커플은 그림 한 점 사고 싶다고 일부러 방문한 적도 있다. 그림을 받아들고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책정된 가격은 없다. 아내에게 얼마에 팔면 되냐고 물어본 후 얘기하는 것이 전부다. 

사장님이 아들을 가졌을 때 꾼 태몽을 표현한 그림. 우리 아이가 이 사자처엄 아름답고 환경에서 용감하게 자라기를 한없이 기원해 본다. 

다 좋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는 사람이 그렸을 것이라는 단 한 가지 편견만 뺀다면. 선입견은 무섭다. 자기 편한 대로 사람을 예단하고 결정해 버린다. 그 사람이 원래 무엇이든, 주변 상황에 모든 것을 맞춰진다. 나는 사라지고 남이 바라보는 나만 남게 된다.

풍선을 달고 하능을 나는 돼지를 보고 있으면 기분까지 좋아진다.

'저 그림들 사장님이 직접 그린 건가요' 어떤 손님은 "직업이 화가세요."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종종 듣는 얘기다. 심지어는 "작품들이 매우 훌륭합니다"라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그림들이 여기저기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대답하기 쉽다. 그냥 "네"라고 답하면 된다. 굳이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문제는 혼자 있을 때다. 사장이 직접 그린 것은 맞다. 문제는 그 사장이 내가 아니라는데 있다. 나는 노예일 뿐 사장은 아내이니. 손님들이 그걸 알 턱이 있나. 그냥 혼자 카페를 지키고 있으니 당연히 내가 사장인 줄 알 뿐. 이럴 때는 구구절절이 설명해야 한다. “직접 그린 것은 맞는데 제가 아니라 진짜 사장인 아내가 그린 겁니다." 대답을 들은 손님들은 대부분 ‘아, 그렇군요’라며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짓는다.

집에 와서 경험을 이야기 하면 아내가 항상 꺼내는 말이 있다. “당신이 화가처럼 보이나 보지? 왜 그렇게 생각하지? 어딜 봐서? 아무리 봐도 미술이랑은 담쌓은 것처럼 보이는구먼.” 틀린 말이 아니다. 솔직히 내가 봐도 그렇다. 시커먼 얼굴에 어딜 봐도 평범한 모습이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날카로움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으면 개나 고양이도 경계를 하지 않는다. 얼마 전 부산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인터뷰를 위해 남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주변을 어슬렁대다 폴짝 뛰어올라 무릎 위에 앉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배까지 드러내면서. 고양이가 이런 모습을 한 것은 처음 봤다. 주인도 말했다. "얘가 그런 애가 아닌데. 이상하네." 그때 알았다. '나는 정말 만만한 놈이구나.'

하늘을 나는 날치

아내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다. 나는 미술이랑 담을 쌓은 사람이다. 어릴 때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던 적이 있었다. 동그란 원을 하나는 작게 또 하나는 더 작게 그린다. 사람들이 묻는다. “이게 뭐야?” “지구를 침략한 외계 우주선이요.” 긴 침묵이 흐른다. “응. 그렇구나...” 이후 절대 남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도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미술이었다. 성적표를 받으면 언제나 ‘미’였다.(당시에는 성적표에 점수 대신 '수우미양가'가 적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아야 했던 것 같다. 내가 봐도 형편없었으니까. ‘양’이나 ‘가’를 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다행히 그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미를 받은 것을 두고 우스갯소리로 ‘미술이니까 미(美)를 받는 거야’라고 아재 개그를 하곤 했지만 언제나 자존심이 상했다. ‘왜 나는 미술을 이렇게 못할까’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딱 한번 예외가 있기는 했다. 우연치 않은 실수였다. 수채화 물감으로 소나무를 그리는 과정에서 어쩌다 얼룩이 졌는데 얼핏 보면 소나무 줄기를 닮은 모습이었다. 그게 마음에 드셨는지 당시 미술 선생님이 전무후무한 ‘수’를 주셨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다시 해보려 했지만 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실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산 위의 정자. 내가 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예술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림을 그리려면 적어도 있는 사물 정도는 제대로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화가가 되려면 창의성이 있고 사물을 나만의 시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수제 안경테를 만드는 장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예술'이라고.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변화보다는 현실을 택하고 모든 것을 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 남의 시선으로 평가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예술이다. 나보다 남이 어떻게 보는 가를 중시하고 새로움보다는 지금 그대로를 고집하는 한 나는 예술가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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