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굴러다니는 영어 단어 학습서가 몇 개 있다. 어원과 뉘앙스로 배우는 페OO Vocabulary, 초스피드로 중고급 어휘를 마스터하는 Voca 33,000 등. 대학교 때 다들 사서 보길래 샀던 거 같다. 사놓기만 하고 공부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다행이다.
두꺼운 책을 펴보니 첫 단어는 "abdicate". 퇴위하다, 포기하다. 같은 어근 dic(t)를 가진 단어들이 함께 소개된다. addict-중독자, indict-기소하다, predicament-곤경, verdict-평결 등. 그다음 단어는 "abduct"-납치하다, 유괴하다. 이렇게 끝없이 단어들이 한국어 뜻과 함께 소개된다. 물론 예문과 함께.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열심히 외운다. 깜지를 쓰기도 하고, 형형색색 형광펜을 동원하여 이쁘게 공부하기도 한다.
문법 공부는 제목부터 한자인 성문 종합 영어로 전 국민이 마스터하거나 마스터하기 위해 노력하다 죽는다고 치자.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영어가 안 되는 건 역시 단어 때문 아닌가? 이런 생각에 요런 책들이 팔리는 듯하다. 그리고 내가 영어가 안 되는 이유는 이런 보카 책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노오력이 부족했고 의지박약이었던 것이지 '암기'라는 공부 행위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법을 공부해서 문장의 구조를 알고 거기에 단어만 꽂아 넣으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단어만 많이 암기해서 알고 있으면 얼추 영어를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정말 그럴까? 이런 식으로 영단어와 예문을 암기해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없고, 정말 없다. 우리말 단어를 당신은 얼마나 외웠길래 지금 한국어를 하고 있단 말인가? 한국어는 모국어이고 영어는 외국어이니 다른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고 믿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언어는 같은 방법으로 습득된다. 그래야 이중언어자(bilingual)가 될 수 있다. 영어를 한국어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이중언어자가 아니다. 영어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영어를 모국어로 해석하는 전문 기술을 배웠을 뿐 영어 자체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다. 어찌 보면 우리가 학교에서 한 행위는 영어 습득이 아닌 GTM (Grammar Translation Method -문법해석학적방법)으로 시험의 기술을 익힌 것이다. GTM이 아니라 GAM이 올바른 방법인 것을 모르고 우리는 쓸모 없는 공부를 한 것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으면 GAM에 대해 감이 잡힐 것이다.)
만약 영단어를 한국어와 짝지어 암기해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신고해 주길 바란다. 잠깐! 여기서 영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영어 시험 점수가 높다는 게 아니라 영어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사를 영어로 직접 표현할 수 있는 이중언어자(bilingual)의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영어로 싸울 수 있어야 영어를 잘한다고 할 수 있다. 100분 토론 나가서 싸워서 이기려면 말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로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하듯 영어도 마찬가지다. 물론 당신이 당장 토익, 토플, 또는 GRE 같은 시험을 코앞에 두고 있다면 암기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험 점수에 보탬이 될지언정 영어 실력 향상에는 별 영향이 없다. 이번 주 직원 면접에서만 토익 960점 이상 지원자 2명을 봤는데 영어 인터뷰를 해보니 영어를 전혀 못한다. 소위 말하는 SKY 출신들인데도. 전혀 놀랍지 않다.
당신이 단어를 'abdicate - 퇴위하다'식으로 한국어 단어와 짝지어 외웠다면 영어 실력 향상에 1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즉각 중단하길 바란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암기한 것은 모두 잊어먹는다.
우리가 암기한다는 것은 두뇌의 서술적 기억(declarative memory, 또는 explicit memory)에 의존하는 것이다. 서술적 기억이란 전화번호, 자동차 번호판, 과거의 어떤 장면 등을 기억할 때 사용한다. 단어 암기는 숫자, 냄새, 색깔, 이미지 등을 기억하는 행위와 유사한 두뇌 활동이다. 서술적 기억의 특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두 잊게 된다는 것이다.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따라서. 우리가 외운 것은 한 달이 지나면 80% 정도를 망각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잊어먹을 만하면 또 암기하고 또 암기하고... 이렇게 반복적으로 암기를 해서 장기기억소에 저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이런 생지랄을 해도 안 외워지면 그것도 이상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장기기억 장소가 도대체 두뇌의 어디에 해당하는가? 언어를 사용할 때 그 장기기억소라는 데에 우리가 접속을 하기나 하는가?
2.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암기한 것을 기억해 내는 행위가 아니다.
시험 보는 중에 단어 뜻을 기억해 내야(recall) 한다면야 암기한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암기한 것은 기억해 낼(recall) 필요가 있을 때에만 쓸모가 있는 것이다. 말하거나 글을 쓸 때(produce)에는 소용이 없다. 비유하자면, 컴퓨터에 C 드라이브와 D 드라이브가 있다고 가정하자. 영어를 듣고 말하고 읽고 쓸 때에 CPU(뇌)는 C 드라이브(좌뇌)를 접속하는데, 우리가 외운 단어들은 죄다 D 드라이브에 저장한 격이다. 그것도 33,000개의 단어를 외우겠다고 덤볐으니 너무 많아서 zip 파일로 압축해서 저장해 놓았다. 그렇다 보니 시험 볼 때에는 D 드라이브에서 압축 풀고 끄집어낼 수는 있는데, 즉 recall은 할 수는 있는데, 막상 말을 하려고(produce) 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이다. 그땐 C 드라이브에 접속하기 때문이다. 토익 900점이 넘어도 영어가 안 되는 그 불가사의한 일이 이제 이해가 가는가? 언어를 구사할 때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게 되면 이해가 더 빠를 것이다.
fMRI (functional MRI)의 개발로 우리 두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언어를 - 외국어든 모국어든 - 사용할 때에는 좌뇌의 베르니케 영역( Werinicke's area)과 브로카 영역(Broca's area)이 동원된다. 그렇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에는 두뇌의 이곳저곳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좌반구에 있는 특정 영역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1997년 네이처지에 <Distinct Cortical Areas Associated with Native and Second Language Speakers> (Karl Kim, Norman R. Relkin, Kyung-min Lee, Joy Hirsch)라는 논문이 게재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어려서 이중언어자가 된 사람들(early bilingual)과 성인이 되어서 이중언어자가 된 사람들(late bilingual)에 대한 비교 연구가 진행되었다. 예상대로, 어느 경우이건 두 언어를 구사할 때에는 같은 베르니케 영영과 브로카 영역을 사용한다. 단 late bilingual의 경우는 모국어와 외국어를 구사할 때 사용하는 영역이 완전히 겹치지는 않고 바로 인접해 있다는 것도 밝혀냈다. 그러나 결론은 모국어와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들은, early bilingual이건 late bilingual이건, 모두 같은 좌뇌의 베르니케, 브로카 영역이 작동한다는 점이다. 이것으로부터 역으로 유추할 수 있는 점은 모국어 건 외국어 건 습득하는 방법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2001년 Georgetown 대학 Michael Ullman이 발표한 논문 <The Neural Basis of Lexicon and Grammar in First and Second Language: the Declarative/Procedural Model>에서는 외국어(L2)를 잘 구사하지 못할수록 모국어(L1)를 사용할 때 보다 뇌의 전체적인 부분(좌우 반구)을 활용한다는 사실을 fMRI와 PET 뇌 촬영을 통해 밝혀냈다. 영어 공부 정말 평생토록 열심히 했는데 막상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 이상으로 진행이 안 되는 우리나라 성인의 머릿속이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 한국어와 영어는 1:1로 짝지을 수 없다.
과거 홈쇼핑에서 '깜O이'라는 단어 암기 기기가 수백 만대 팔렸다고 들었다. 화면에 'run'이 잠깐 나왔다가 곧이어 '뛰다'가 나온 후, He runs to school 같은 예문이 나온다. 곧이어 한국어 '그는 학교에 뛰어간다'는 해석이 나온다. 'run=뛰다'가 맞을까?
He’s running for president.
He runs the company.
I’m running out of gas.
My car runs on diesel.
Buses to Oxford run every half-hour.
All the trains are running late.
She ran her fingers nervously through her hair.
He had a scar running down his left cheek.
The tears ran down her cheeks.
Who left the tap running?
Your nose is running.
Supplies are running low.
NYT decided to run the story.
여기서 '뛰다'로 번역되는 문장이 있는가?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회사를 운영한다.
기름이 떨어져 간다.
내 차는 디젤로 가는 차다.
옥스포드행 버스는 매 30분마다 있다.
모든 기차가 연착되고 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쓸었다.
그는 외쪽 빰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있었다.
그녀 빰에 눈물이 흘렀다.
누가 물 틀어놨어?
너 콧물 흘러.
보급품이 부족해.
NYT는 그 기사를 싣기로 했다.
한국어 단어의 약 13%가 동사인 반면, 영어는 약 6%에 불과하다. 한국어 단어와 영단어를 1:1로 매칭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단어의 특징 자체가 '모호함(ambiguity)'에 있기 때문에 우리말로 정확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1:1로 짝지어 외운 행위를 일대일 식으로 표현하자면... shoveling이다. 삽질. 이것도 외울 참인가? shoveling = 삽질?
그럼 뭘 어쩌란 것인가?
영어는 '영어'로 '사고'(추측, 상상, 추론, 비판, 감상)하는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축적'되어 '스스로 깨달아(자각)' '저절로' 생기는 능력이다.
"사고(상상, 추론, 비판, 감상)"하는 과정이 생략된 학습은 단어 습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단어가 되려면 그 단어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이 축적되어야 한다. 단어의 뜻을 한국어로 외우는 시간이 아니라 그 단어의 뜻을 끊임없이 추론하는 시간이 축적되어야 한다. 어휘력은 그 시간의 축적과 비례한다.
1. 읽어라.
스토리가 있는 Narrative Reading을 하라. 쉬운 말로 소설을 읽으라는 뜻이다. 소설을 읽을 만한 수준이 안되면 동화책을 읽어라. 교과서를 읽는 Textbook Reading이나 신문 잡지의 Journalistic Reading은 아주 나중으로 미루고 상상과 내용 추측이 가능한 스토리북을 읽어야 한다. 자신의 수준에 맞거나(i), 좀 도전적으로 한 수준 더 높거나(i+1), 아니면 좀 쉽거나(i-1), 어떤 책이든 상관없다. 꾸준히 읽을만한 것이라면. 단, 한 페이지에 모르는 단어가 5개 이상 나오면 좀 더 수준 낮은 책으로 교체한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가장 중요한 Narrative Reading을 거의 안 하고 Textbook Reading과 Journalistic Reading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영어 동화책 한 권 안 읽어본 사람들이 대학 가서 영어로 된 전공 원서나(Textbook Reading) Times지(Journalistic Reading)를 읽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방정식도 못 푸는데 미적분하고 앉아 있는 꼴이다. 삽질의 최고봉이다. 서울대 도서관 가면 흔히 볼 수 있다.
2. 사전 없이 읽어라.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부터 찾지 말고 뜻을 추측해 보라. Guessing이라고 한다. 앞뒤 문맥을 살펴보고 상상이라도 해라. 그리고 그냥 넘어가라. 뜻을 잘못 추측한 단어는 나중에 스스로 교정할 기회가 온다. 무엇보다 영어를 정복하려면 최선을 다해 대충 넘어가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전문 용어로 Ambiguity Tolerance. 애매모호함을 견디는 능력. 모르는 것을 답답해하지 않고 견뎌내는 내성을 키워야 한다. 나는 딱 부러지는 성격이라 대충 못 넘어가는 성격이라면 그 성격 고쳐라. 정 갑갑하면 영영사전을 참고하라. 영어를 영어로 설명해 놓았으니 또다시 추측해야 할 것이다. 사전을 찾지 않고 영어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이 사전을 찾아가며 읽은 아이들보다 어휘력이 좋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대충 넘어가는 습관이 왜 중요하냐면 바로 아래 3번 때문이다.
3. 아주 많이 읽어라.
졸라 많이. 전문 용어로 Extensive Reading. 다독(多讀)이라고도 한다. 교과서, 연애편지, 매뉴얼 등은 Intensive Reading, 즉 정독해야 한다. 그러나 영단어가 늘기 위해서는 다독을 해야 한다. 다독을 하기 위해서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 다독의 다른 말은 즐독이다. 재미없는 것을 억지로 많이 읽으면 진짜 독(毒)이 된다. 영어 못해서 쪽팔려 죽기 전에 재미없어 죽을 수도 있다.
"독서는 영어를 습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다"
<읽기 혁명(The Power of Reading)>의 저자 스티븐 크라센 교수의 주장이다. 스 교수님 강의를 들어보면 구라 과장이 좀 있긴 하지만 설마 유일한 방법일까? 아마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우는 유일한 방법임을 설파하려고 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 성인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영어 소설책을 1시간읽을때마다토익점수 0.62점상승했다는 임상결과가 나왔다.
오카다씨 소설읽기 127시간 (40점 상승) 다나카씨 소설읽기 213시간 (180점 상승) 이론적으로 3년간 매일 1시간 독서 (토익 250 → 950)
오까다씨도 되고 다나까씨도 되는데 우리라고 안 될 이유 없다.
왜 이렇게 독서를 강조할까? 요즘 미드나 영드로 영어 공부하는 사이트나 스터디 모임도 많던데 책 대신 영화나 드라마는 어떨까? 영화나 드라마는 Listening 향상에 도움이 된다. 그러니 자막 없이 많이 볼수록 좋다. 그러나 문법과 어휘력 향상을 위해서는 독서만 한 게 없다. 왜 그럴까?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영어는 사고(추측, 상상, 추론, 비판, 감상)하는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축적되어 스스로 깨달아(자각) 저절로 생기는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고'는 능동적 인지(Active Cognition)를 가리킨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리포터 영화를 볼 때와 해리포터 책을 읽을 때를 비교해 보라. 완성도가 높은 영화일수록 자기는 능동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없다. 수동적으로 반응하느라 바쁘다. 누가 사고를 했을까? 그렇다. 생각은 영화감독과 작가가 다 했고, 우리는 받아먹었을 뿐이다. 그러나 해리포터 책을 읽어 나가려면 내 머릿속에서 장면을 그려나가지 않으면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못한다. 영화 볼 때와 책을 읽을 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사고하게 만드는가?
여기까지 필자의 글을 읽고도 돌아서면 당신은 단어 암기를 계속할 것이다. 지름길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딱 100일만, 하루 10분만 같은 개구라 광고 문구에 속지 마라. 영어 습득의 지름길은 없다.
여기까지 왔으니 시간 나면 아래 논문/책들도 함 읽어보라. 그래도 못 미더우면 다시 보카 33000으로 돌아가라.
“단어를열심히외운다고어휘력이향상되지않는다”
Hermann , F. 2003. Differential Effects of reading and memorization of paired associates on vocabulary acquisition in adult learners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TESL-EJ.
“4년동안어휘지도를받은시간과독해력및어휘향상점수 간에는특별한상관관계가없다”
Unfulfilled expectations: Home and school influences on literacy. Harvard University Press
Snow.C, W. Barnes, J.Chandler, Goodman, and H. Hemphill,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