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다’는 말은 듣기만 해도 벌컥 화가 나는 단어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남들이 어떻게 보겠니?” “착하게 살아야지”. 엄마는 늘 남의 시선이 중요했다. 내가 말할 때면 수용되기보다는 그 말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늘 검열의 눈치를 주셨던 분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딸이 남의 눈에 착하게 보이기를 바랐고 그것을 사랑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기의 마음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길 바랐다. 우는 아이에게 “이런 데서 울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니?”보다는 “무엇이 불편하니?”라고 물어봐주길 바랐다.
91세인 엄마는 아직도 누군가를 칭찬할 때 ‘착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착하다’는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다. 듣기만 해도 벌컥 화가 나는 단어다. 언젠가는 큰맘 먹고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엄마는 착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자기 욕구보다 남들 욕구에 맞춰 살라는 거잖아.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나한테 한 번이라도 원하는 게 뭔지 물어봐준 적 있어?”
당시 이런 말을 내뱉고선 또 나를 얼마나 자책했었는지 모른다. 나이 들고 헌신해 준 엄마에게 너무 모진 딸이 된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공부를 하다 보면 첫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의 첫 기억은 명확하지 않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강렬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식모(남의 집에서 일해주면서 먹고 자는 사람) 언니의 등에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 있는 나의 모습이다. 평온함보다는 울다 지쳐서 잠든 모습이다.
엄마는 식모가 나를 키운 것에 대해 종종 자랑하듯이 말하곤 했다. 모두가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먹이고 가르치는 일만 잘해도 부모 역할을 잘 한 때였다. 하지만 어린 내게 비친 부모의 모습은 돈만 버는 부모였으며 마음을 보살펴주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집안은 남자인 아버지 위주로 돌아갔고 여자인 엄마는 그저 남자의 부속물처럼 여겨졌다. 어린 내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여자인 엄마는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 아버지는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생각해 보면 적개심과 분노가 많았던 나, 반항적이었던 나, 약한 존재를 싫어했던 나, 그리고 사랑받고 싶었던 나는 분명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다.
주변 지인들에게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것은 상담공부를 한 것이다. 그 어떤 공부보다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키고 내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지금 쓰는 이 글은 엄마를 원망해서 적는 것이 아니다. 엄마에게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편안해졌고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힘도 생겼다. 그리고 엄마의 인생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처럼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나는 아직도 주식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돈 불리는 재테크 쪽으로는 머리가 영 돌아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숫자 놀이에 재미가 없다. 그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관심이 많다. 또한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앎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책을 읽으며 행복해할 때가 자주 있다. 현재 나의 삶에서 누리는 커다란 유희활동 두 가지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책을 읽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바란다.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책 읽기를 오래도록 할 수 있게 내 눈이 잘 버텨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