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일보 <여성의 창> 기고 1
“엄마, 영어 할 줄 알아?”
유치원 학부모 면담을 마치고 마주하게 된 아이의 낯선 질문에 마시던 물을 뿜어낸 적이 있다. 짜증이 확 밀려올 법한 질문이었지만 그날따라 신선했다. 당시 만 4세였던 아들에게 이렇게 엉뚱한 질문이 생겨난 것은 내가 집 밖에서 영어로 말하는 것을, 아니 영어로 말하며 쩔쩔매는 것을 본 적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유치원 선생님과 영어로 대화하는 나를 보며 아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혹여나 영어 한 단어 말할 줄 모른 채 유치원에 입학했던 아들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던 내 생각과 같았을까? 엄마가 영어를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말이다. 당시 아들의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아이의 질문이 너무나 크게 내 안에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영어를 할 수 없다면 어떨까? 내가 어른으로 나서야 할 상황마다 어린 아들을 불러 세워 놓고 통역을 부탁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이후에도 아들은 종종 뼈 때리는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커피를 사서 마시면서 자기는 왜 물을 사주지 않느냐고, 엄마는 핸드폰 보면서 자기는 왜 숙제를 해야 하는 거냐고, 엄마는 한국말만 하면서 자기는 왜 두 가지 언어를 배워야 하는 거냐고. 이런 질문들은 듣고 있자면 마음이 뜨끔한다. 그리고 간혹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의 질문들을 귀 기울여 듣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 낯설고 겁 없는 질문들에 당당히 맞서 대답하려 애쓰다 보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부족한 나의 모습들까지도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엉뚱한 질문이라도 신중하게 받아들이면 가끔 둔탁한 통증과 함께 깨달음이 찾아온다. 이런 깨달음의 상처들을 모른 척하면 평생 감추고 싶은 흉터가 남는다. 반면 호호 불어 보듬어 주면 어떨까? 상처에서 다시 새살이 돋아 한층 더 확장된 내가 될 수 있다. 무지의 부끄러움은 사라지고 상승된 돌봄 지수를 획득하는 것이다. 키가 작은 어린이의 말을 듣기 위해선 몸을 낮춰야 잘 들을 수 있듯이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나의 높아짐을 내려놓고 일부러 낮아짐을 선택하는 최정상급 돌봄 기술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