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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경 Jan 08. 2024

3. 싸움의 책임

사내 경쟁이 사내 전쟁이 되는 과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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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지원은 없을 겁니다만, 최대한 빨리 수익을 내 오세요.


 A와 B는 모두 황당합니다.


 혈혈단신으로 떨어져 뜨려 놓기에 바닥부터 사람을 뽑기 시작했고, 뽑은 사람들이 겨우 수습을 지나고 있는데, 갑자기 매출을 가져오라니...


 아무 일 없이도 새로운 제품의 연구와 기획을 시작하고부터 매출을 내기까지는 1년도 빠듯한 게 이 업계인데, 새로운 제품의 연구와 구상을 시작하던 단계에서 핵심 인재들을 전부 다른 팀으로 빠지거나 퇴사하게 해 놓고 반년도 안 된 지금 매출을 가져오라니...


 말도 안 되는 주문을 받은 A, B는 이제 조직의 그 누구보다도 이 싸움에서 도망치고 싶어 졌지만, '나를 믿고 와달라.'며 사정해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만 도망칠 수는 노릇입니다.


 게다가 이번 싸움을 통해 이미 평판, 사람을 비롯해 많은 것을 포기했기에, '이 시점에서 대표님이 내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난 이후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이직하기도 글렀다.'는 계산이 섭니다.




부상병을 이끌고 진짜 전쟁터로

 

 A, B에게서 망가진 것은 커리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도 납득되지 않는 정책들을 참고 받아들여가며, 경쟁이라는 명목의 분쟁을 매일 같이 수개월간 겪다 보니 A, B 모두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버렸습니다. 사실 이젠 이직이고 뭐고 그저 스톡옵션 행사일까지 버티다가 퇴사해서 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A가 임원 회의실에서부터 지친 몸을 이끌고 사무실로 돌아가니 자신과 그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사원들이 보입니다.


 열정과 결의를 가득 담고 '함께 하겠다.'라고 대답하던 눈동자들이, 지금은 퀭하니 힘을 잃고 모니터 불빛에 맞춰 색만 바꿔댑니다. 그러다 때때로 큰 한숨만 푸욱 뱉어내면서 창밖을 봅니다.


  반년 가까이 개발자, 디자이너 인재 찾기만 하다 보니 이젠 내가 헤드헌터인지 기획자인지 모르겠다. 속았다. 괜히 왔다. 같은 푸념도 지나가는 길에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게 되어 매번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지원도 시간적 여유도 없이, 바로 시장에 제품을 출시해서 돈을 벌어와야만 한다는 소식을 전달하려니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본부 사무실로 돌아온 B 역시 다르지 않은 마음입니다.


 멀쩡히 좋은 팀워크로 잘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중단되어 버린 이후, 그 자리를 '우리가 왜 저 신규입사자를 데려와야 하는지 보고서 쓰기', '이 프로그램을 왜 B본부만 사용해야 하는지 대표님을 설득할 기획서 쓰기' 같은 소모적인 일들로 채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제품이 아닌, 대표님께 올릴 보고서를 A팀보다 멋지게 꾸미는 것이 본업이 되어버렸고, 영업 담당자들의 주 영업대상도 고객이 아닌 대표님이 되었습니다.


 엔지니어들은 요구사항 정의서도 화면설계서도 프로토타이핑도, 개발할 때 넣을 에셋도 전달되어오지 않는 상황에서 수개월째 방향성 없는 리서치만 진행하고 있습니다.


 리서치의 결과는 대체로 새로운 기술에 대해 대표님께 발표하며 'A팀은 이런 걸 할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사실을 어필하는 데에 쓰일 뿐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소모적이고 보람 없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그 내용 자체로 상대 조직에게는 공격이 되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얼마 전까지 함께 하던 동료인데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한다고?


 서로의 발표를 들을 때마다, 서로가 서로의 자원을 가져가거나 상대 조직에서 할 일을 방해하고 깎아내릴 때마다 서운함과 배신감은 쌓여갔고, 그것은 모든 조직원들에게 상처를 주고 피로도를 높였습니다.


 진짜 해야 할 싸움은 시작도 안 했는데 지원은 끊겼고 직원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 싸움을 이긴다고 해서 얻을 것이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버텨봤자 아무 메리트가 없을 것을 감지한 직원들은 빠르게 이직처를 찾아 빠져나갔고 스톡옵션, 사내어린이집, 사내 전세자금대출 등에 묶여있는 직원들과 아직 경력 2년을 채우지 못한 신입들만이 남았습니다.


 주니어들 사이에서는 2년을 꼭 채우고 퇴사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전역'이라고 부르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A와 B는 이제 이 상태 그대로 직원들을 이끌고 진짜 전쟁터인 '시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완성을 위한 완성


3개월 뒤, A팀이 먼저 완성된 제품을 선보였습니다.


 개발자도 디자이너도 모자랐고, 3D 모델러는 아예 구인하지도 못한 A팀은, 당초의 계획이었던 'AR 솔루션'에서, '2D 이미지 가상 피팅'으로 아이템을 변경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네킹 인형의 체형 종류가 다양하지 않았고, 옷이 얹어지는 모습조차 너무 어색하게 구현된 탓에, '유아용 인형놀이 게임 같다.'는 혹평을 받으며 시장으로부터 외면받았습니다.



 

 한편 A팀이 단 3개월 만에 무어라도 제품을 출시했다는 소식에 B본부는 바빠졌습니다.


 제대로 된 AR 피팅 솔루션을 만들려면 3개월이라는 시간은 그 방향성을 잡고 기획하는 데만도 빠듯한 시간이었지만 대표님은 계속 A팀을 가리키며 B본부에게 어서 매출을 내 올 계획을 올리라고 독촉합니다.


 결국 B 본부는 매출에 대한 압박으로 인해 'AR 피팅 솔루션'의 제작을 무기한 연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 프로젝트였던 'VR 직업훈련 솔루션'을 디자인만 추가하고 거의 비슷하게 재출시하여 매출을 올려보는데 집중하기로 하였습니다.




수습을 위한 수습


 다급해진 A팀은 이 솔루션으로 매출을 낼 방법을 궁리하다가, '체형별 착장 랜덤 추천 서비스'로 다시 방향을 틀었습니다.


 방향을 튼 이후에도 매출이 전혀 나지 않자, 판매 촉진을 위해 '랜덤하게 나오는 착장세트의 등급이 높을 경우, 현금성 포인트를 지급'하기로 하였습니다.


 없던 매출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곧 사행성 논란과 의류 디자인 무단 활용 논란으로 인해 많은 질타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A팀은 해당 논란에 대해 '디자인 무단 활용 논란이 된 의류들은 모두 서비스에서 제외하고, 랜덤 추천에 대한 결과로 현금성 포인트를 지급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A팀의 서비스는 파트너사도, 고객도, 좋은 기업 이미지도 얻지 못하며 서비스를 종료하였습니다.


 경쟁사들도 언론도,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제법 좋은 품질의 AR 솔루션을 서비스하던 알짜배기 회사가 어쩌다 이런 것을 시장에 내놓게 되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사람들은 뉴스를 보며 '도대체 기업 안에 저게 별로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건가?'라는 의문을 주고받습니다.


(소니는) 미국에 출시할 예정이었던 온라인 음악 다운로드 서비스를 미국 사업 부문과 동경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 부문이 동시에 개발하였다. 미국 사업부문이 만든 서비스는 저작권 문제로 출시를 미루었고, 동경의 개인용 컴퓨터 사업 부문은 미국 젊은이들의 취향을 모른 채 만든 ‘커넥트’ 서비스를 성급하게 시장에 출시한 후 혹평을 받았다.

- 허진, 『내부 경쟁의 득과 실』, LG주간경제, LG경영연구원, 2006, p16



손실에 대한 책임


 수십억 원의 손실을 낸 A 팀장은, 책임지고 팀을 정리하라는 대표님의 말씀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팀원들에게는 세간의 웃음거리가 된 포트폴리오를 경력기술서에 남긴 것이 크게 미안할 뿐, 오히려 이 회사로부터의 탈출을 권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은 크지가 않습니다.


 다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각기 다른 이유로 회사에 꼭 붙어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원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무자비하게 사직을 권고해 대는 A 팀장이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보일 뿐입니다.


 팀원들의 시선과 여론은 직접 듣지 않아도 느낄 수 있지만, 내가 한 약속을 내가 지키지 못했으니 이렇게 미움받는 일도 실패한 리더로서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의 인력만 남겨 B 본부로 보낸 A 팀장은 정리를 끝내고 스스로도 오랫동안 준비해 온 사직서를 꺼냈습니다. A의 퇴직일자와 마지막 출근일은 아주 빠르게 정해졌습니다.




 A가 수년을 바친 기업에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길은 쓸쓸합니다.


 믿어주었던 팀원들은 전부 내보내 버렸고, 몇 남은 직원들조차 감정이 상할 대로 상한 채 다른 조직으로 옮겨갔으니 마지막 나가는 길을 배웅해 주는 이는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 챙긴 짐을 책상에서 들어 올리려던 차에, B 본부장이 텅 빈 A팀 사무실로 어색하게 들어와 A의 눈은 보지 못하고 옆에 섭니다.


'이거 다 어떻게 옮기냐.', '집은 멀던가.' 같은 의미 없는 질문들을 착잡한 얼굴로 건네던 B는, 여전히 A의 눈은 보지 못한 채 A의 등을 툭툭 치며 말합니다.


고생 많았어요.
서운한 것도 많았을 텐데 미안해요.
나가서 꼭 연락해요.
술 한 잔 합시다.

 

 B의 짧고 덤덤한 네 마디 말에, A는 당장이라도 엉엉 울며 풀어버리고 싶은 지독한 기분을 속으로 삼키 '그래요.'라고만 답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탄 A에게 B는 목례인 듯 아닌듯한 어색한 인사를 건넵니다.


 답으로 옅게 끄덕이는 A의 모습을 가리러 모여드는 엘리베이터 문이, 마치 연극이 막을 내릴 때 닫히는 커튼 같다고 B는 생각합니다.


 B는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사무실로 걸음을 돌립니다.



승자 없는 싸움


 본부의 사무실로 돌아온 B는 불과 1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휑해진 자리들을 보고, 그 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봅니다.


 들어오기 전 면접 볼 때의 모습부터 나갈 때의 모습까지 모든 모습들이 기억이 나면서, 그들을 데려올 때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꼭 필요했던 인재가 오퍼를 수락해 주었을 때 얼마나 안도스럽고 기뻤던지에 대한 생각이 지나갑니다.


 그러고 나서 새삼 A가 데려간 인원들보다 그저 이 싸움 속에서 회사와 리더에 대한 실망감을 느껴 떠나간 인재가 더 많다는 사실이 깨달아집니다.


대표님은 이를 두고 'B가 생각하는 경영 방식에 맞는 사람들을 회사가 추려내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은 것뿐'이라고 하지만,


 추려진 것은 B의 경영 방식에 맞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연봉, 복지와 같은 물질적인 보상보다 성취감, 훌륭한 동료들에 대한 감사, 일을 할 때의 재미와 같은 가치들에 훨씬 더 무게를 두는 사람들 같다고 B는 생각합니다.


 A가 먼저 나갔을 뿐 A가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B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아군끼리 교전을 하다가 넝마가 된 둘이, 적군이 있는 전장에는 제대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한 꼴이었습니다. 오히려 B는 패자 중에서도 출정조차 못 해본 쪽이었습니다.


 단지 A는 팀을 정리하는 것으로 손실에 대한 책임을 다 했다면, B는 기존 프로젝트를 다시 우려 추가적인 수익을 내고 손실을 보완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 해야 나갈 수 있을 뿐입니다.


 차라리 이젠 집에서 편히 슬퍼할 수라도 있는 A가 부럽다고 생각하며, B는 다시 형식적인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노트북을 엽니다.


구성원들 간의 경쟁의식만을 자극할 것이 아니라 경쟁 속에서 협력의 실마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 허진, 『내부 경쟁의 득과 실』, LG주간경제, LG경영연구원, 2006, p20


- 사내 경쟁이 사내 전쟁이 되는 과정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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