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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경 Jan 28. 2024

회사 생활이 처음인데 팀장을 하라고요?

튜토리얼 끝나자마자 하드모드가 시작되었다.

직장인으로 일하는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저는 학부를 졸업한 후, 기업에 취업하지 않고 프리랜서 3D 모델러로 3년간 일을 했습니다.


 개인사업자를 내고 5번의 크라우드펀딩을 성공시키고, 개인 스마트 스토어와 3D 에셋 판매 플랫폼에서도 대기업에 취업한 친구들 부럽지 않은 수익을 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랜서라면 모두가 경험하는 지독한 불안감과 외로움의 굴레 속에서 고민하던 중,


"직장인 경력만 쌓다가 프리랜서를 할 수는 있지만, 프리랜서 경력만 쌓다가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사회 초년생 시기에 조직 생활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다."

 

라는 어른들의 조언을 듣고 제가 하던 일과 연관된 기업 공고를 찾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경력사원이지만 회사 생활은 처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원 결과 감사하게도 프리랜서 경력을 인정받으며 유니콘 기업에 일반 사원으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맨땅에서 사무실도 PC도 각종 SaaS 비용도 전부 스스로 지불하며 판매처를 직접 뚫어 일하던 저에게, 처음 들어간 회사는 너무나도 따스했습니다.


 신규입사자의 부드러운 정착을 위해 마련된 다양한 정책들과 훌륭한 역량을 가진 따뜻한 팀원들을 만나 신규입사자로서 살뜰히 챙김 받는 하루하루가 눈물나게 감사했습니다.


 황무지에서 구르다가 아늑한 법인의 울타리 안으로 갓 들어온 저는


 '어른들이 자영업하지 말고 회사가라고 하신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역시 어른들 말씀을 들어야 돼.' 같은 생각들을 하며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회사 생활이 너무 행복하다는 저에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던 주변 친구들을 보면서도 '회사가 힘들다는 사람들은 개인 사업자를 해보지 않아서 그런게 분명해. 다들 진짜 어려움을 모르는거지.' 따위의 생각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고작 1달 정도의 회사 생활로 '회사 생활' 자체의 난이도를 판단해 댄 것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인지, 저의 안락한 회사 생활은 수습기간 3개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일반 사원으로서의 수습기간을 넘기자마자 매니저로서의 수습기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입사 전 저의 직무는 '3D 모델링'이었지만, 입사 후 제가 주로 하게 된 일은 '3D 모델링을 평면 이미지로 추출해 만화에 어울리게 보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관련 직종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분하기 어렵고, 두 가지 역량을 모두 갖고 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각 직무에 필요한 역량에는 엄밀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사 당시에는 실제 내부에서 하는 업무와 다른 전문성을 가진, 3D 모델러를 뽑는 JD가 올라가 있는 바람에 여러 가지 비효율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타부서로 예시를 들자면 프론트엔드 개발자를 뽑는 자리에 백엔드 개발자를 뽑는 JD가 올라가 있는 바람에 지원한 백엔드 개발자들 중 그나마 프론트엔드 개발이 가능한 분을 뽑아, 프론트 개발을 가르쳐 업무에 투입하는 식이었습니다.


 당연히 인재가 영입되는 속도도 느려지고, 일을 함께 나눌 동료들이 들어오는 속도가 느려지니 기존 인원이 감당해야하는 일의 양은 많아졌습니다.


 그 와중에 어렵게 새로 들어오는 인원들도 적지 않은 양의 교육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3D 모델링팀과 3D 이미지 보정하는 팀을 나누어서 JD를 올리기만 하면,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부분을 바로잡지 않고 가다가는 저의 이지모드 회사 생활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을 하며 퇴근길 복도를 걸어가던 중, 일반 사원으로서는 뵙기 쉽지 않던 그룹장님을 갑자기 복도에서 마주쳤고, 순간적으로 저는 맥락없이 "죄송한데 잠깐만 뭔가 말씀드려도 될까요?"를 외치게 되었습니다.


 당황스러울 수 있으셨을텐데, 당시 그룹장님은 너무나 흔쾌히 "그럼요, 말씀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제가 당연히 들어야죠."라며 시간을 내어주셨습니다.


 다만 오히려 그룹장님보다 저 스스로가, 일단 지르기는 했지만 충분한 자료도 준비하지 않은 채 귀한 시간을 빼앗게 되어 혼자서 크게 당황해서 다급히 외쳤습니다.


 "내일 괜찮으신가요? 내일 제가 자료 간단히 준비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3시간안에 그룹장님께 제출할 제안서 만들기


 집으로 달려간 저는 3D와 3D 추출 이미지를 보정하는 일의 차이점을 정리하고, 제가 입사하기 전부터 기존 팀원들이 해온 일들이 각각 어디에 해당되는지 나누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기업이 이 팀에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원하는지에 따라, 새로운 JD에 들어갈 사항이 어떻게 달라질 지에 대한 경우의 수들을 적어넣었습니다.


 아직 수습 통과도 못한 사원의 말 한마디에 팀을 나누고 JD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을텐데, 왜 나는 그렇게 충동적으로 '내일 아침'을 외쳤을까.


 스스로 불러온 빠듯한 마감 기한에 대해 자책하며, 설득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들로 ppt를 구성해 다음날 아침 그룹장님께 자료를 송부드렸습니다.


 '말씀드릴 부분에 대해 간단히 자료를 정리해보았습니다. 편하신 시간에 불러주시면 설명드리겠습니다 �‍♀️'



괜한 일을 벌였나?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일을 벌였나?


기존에 있던 시스템을 비난하는 것처럼 받아들이시면 어쩌지?


하지만 조금만 바꾸면 크게 개선될 문제인데 그걸 알리지도 못하고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게 될 수는 없지 않나?


모르겠다. 이번 일로 미운털이 박히면 '나는 역시 회사 체질이 아닌가보다.'하고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가야지.


별의 별 생각을 다 하던 중 그룹장님께서 HRBP님과 함께 저를 회사에서 가까운 카페로 불러주셨고, 여러모로 긴장한 제가 최대한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준비한 내용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그룹장님은 이후 액션에 대한 이런 저런 대화를 HRBP님과 하시고, 제게는 '준비한 내용도 인상적이지만, 지금 조직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그룹장을 바로 불러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가 인상적이다.'라는 피드백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재 3D팀원들은 인원이 적어 다른 직무팀 내에, 다른 직무와 섞인 파트 안에 소속되어있는데,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고, 해당 직무에 대한 이해도를 가진 조직장이 필요하다.'는 파트에 대해 이어 말씀하시던 중 물으셨습니다.


본인이 직접 할 생각은 없어요?


네, 없습니다.


그룹장님의 말씀에 저는 실례되는 큰 웃음을 터뜨릴 뻔했습니다.

"저는 말도 안 되죠. 역량도 부족하고 애초에 회사 생활 자체가 처음인데요."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조직 생활 자체가 처음인데 조직 생활을 10년씩 하신 분들도 고전하는 팀장의 자리를 잘 해낼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인해 '사람을 관리하고 이끄는 일'은 목숨을 걸고라도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저였기에, 그 역할을 맡는 순간 저의 회사 생활은 튜토리얼을 끝내기도 전에 하드모드를 아득히 넘어설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팀장을 정하게 된다면 저보다 일찍 들어온 초기 멤버, 관련 전공을 한 팀원 등 저보다 이 회사에 대해 더 잘 알고 이 직무에 대해 더 잘하는 팀원들로 정해지는 것이 모두가 쉬이 납득할만한 결과일 터였습니다.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오히려 실무 역량이 뛰어난 팀원들은 팀 매니징보다 실무자로서 레벨업하고 회사에 기여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라고 느끼고 있지만, 당시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의 손사레에 대해 그룹장님은 당시에는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으셨지만, 이후 제가 그 분과 긴밀히 붙어 일하게 되셨을 때는 이 날을 두고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 날 대어를 낚았지.
아주 팀장 시켜달라고 온몸으로 소리치는 수준이었는데.



나보다 훌륭한 팀원들의 팀장이 되었다.


 사원 수습기간이 지나자, 저는 '액팅 파트장'이라는 수습 매니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벌인 일이 있던 저는 대충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함께 하던 팀원들은 그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실무적으로 특출나지도 않고, 이 회사에서의 경험도 가장 적고, 이 회사를 빼고도 조직을 경험한 기간이 사실상 없고, 관련 전공을 하지도 않은 제가 갑자기 리더 역할을 맡게 되니, 팀원들은 어리둥절할 터였습니다.


 실무적으로도, 조직 경험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저보다 훌륭했던 팀원들은 감사하게도 그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하거나 저를 공격적 혹은 방어적으로 대하는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가장 많은 사람이 키를 쥐게 된 상황은 팀원들과 저 모두에게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팀원들에게 어떻게 내가 당신들에게 훌륭한 매니저가 될 수 있는지 납득시킬 수 있는 근거를 찾기가 힘들었고, 잘 해낼 자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갓 입사한 사원의 한마디에 조직에서 팀을 신설해주시고 분리해주시고 JD를 교체해주신 마당에, 일을 벌려놓은 제가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적어도 내가 벌려놓은 일을 어느 정도 수습할 때까지 만이라도,  부족한 나로 인해서, 훨훨 날 수 있는 팀원들이 빛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게, 회사에서 불행하지 않게, 본인이 성취한 일들에 대한 보상을 온전히 받을 수 있게 만들어야 했습니다.


 잘하는 법은 모르겠지만,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굴뚝같았던 저의 초보팀장 시절 책을 통해, 경험을 통해 배우며 힘겹게 힘겹게 한계단씩 올라갔던 경험들을 이번 브런치북 '훌륭한 팀원들을 매니징하게 되었다.'를 통해 저와 비슷한 상황을 맞닿뜨리게 되신 분들께 나누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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