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원하는 건 다 좋아’의 갑갑함
예전에 어떤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데 한 출연자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데이트를 할 때 센스 있는 사람은 “뭐 먹고 싶어? 난 니가 먹고 싶은 거 다 좋아”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뭐 먹고 싶어? 내가 식당 몇 개 알아봤는데 한 번 골라볼래?”라며 4~5개의 보기를 준비해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대답을 들었을 때 무언가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예전에 지인을 만나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적이 있었다. 2명 이상 모이면 늘 하는 대화의 패턴이었는데, 메뉴 선정에 대한 질문에 지인은 “난 가리는 것 없이 다 먹으니까 네가 원하는 것으로 먹자”라고 대답했다. 평소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지인과 달리 나는 종종 먹고 싶은 것이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편이라 식탐이 많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지인에게 선택권을 받은 나는 서너 가지의 제안을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다 거절당했다. 결국 우리는 지인이 마음속에 생각한 메뉴를 먹으러 가야만 했다.
우연히 유튜브 광고를 통해 아일랜드 드라마 <노멀 피플(normal peaple)>을 발견했는데 보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으면서도 답답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대하는 태도나 연애관도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보다 더 날 갑갑하게 만든 건 여자 주인공이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비밀 연애를 하는데 그 이유는 남자 주인공이 인싸였고 여자 주인공은 아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 중에 더 관계에 집착하는 건 여자 쪽이었는데 대체로 그녀의 대사는 “네가 원하는 건 다 좋아”, “네가 원한다면 난 뭐든 했을 거야” 등이다. 이 대사를 들었을 때 남자 주인공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데 나 역시 그 순간에 숨이 턱 막혀버렸다.
여자 주인공은 예쁘고 굉장히 지적이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정서적 지원과 사랑을 받지 못한 결핍이 크다. 그러다 보니 대학생이 되어 고향을 떠나 주변인들의 사랑을 받지만 여전히 자신을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다. 원하지 않지만 사귀는 남자가 있고 그들에게 하찮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참고 때론 자신에게 그런 표현을 해달라고 직접적으로 상대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망치고 더럽히는 일을 반복한다. 아주 무기력한 얼굴로. 지적이고 화려해 보이지만 그녀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확실했다. 단단해졌다고 믿었지만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선택을 하곤 한다. 요즘 들어 나는 ‘자존감’에 대한 많은 강의를 보았는데, 정말 이렇게 중요한 것을 왜 학교에서 일찌감치 가르치치 않았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알았더라면 나 역시 좀 더 다른 사고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얼마 전에 친구네 집에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큰 일정을 짜지 않고 가긴 했지만 친구와 나는 서로를 배려하면서도 서로가 원하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이고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친구네 동네에 대해 물론 내가 더 잘 알 확률은 낮지만 “아무 거나 먹자”라는 말에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야, 그러면 내가 힘들어져, 호호.” 그 말에 나도 웃으며 여러 가지 제안을 했고 친구는 그중에 우리 상황에 맞는 곳을 골라서 갈 수 있었다.
역시 ‘나는 모든 걸 다 받아들일 수 있어. 나는 네 결정에 모두 따를 거야’라는 말은 ‘너무 많은 이해심은 무관심’ 일 수도 있고 때론 상대방을 막막한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일이다. 그리고 언제나 상대방을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며 서로 건설적인 관계가 되기 어렵다는 신호인 것 같다. 나 역시 이왕이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해 주고 내가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은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뭐든 네게 맞추겠다는 수동적인 나의 모습은 상대방을 지치게 하고 때론 내게 질려버리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 <노멀 피플>의 여주인공 메리앤을 보면서 말이다.
내가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상대에게 나를 다 맞춘다고 했지만, 사실 상대방도 모든 것을 혼자 이끌어 나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번 가족 여행을 준비하면서 느낀 것이다. 그동안 나보다 더 지리에 밝고 더 세심하고 통찰력 있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 배우자에게 여행의 일정 짜기를 많이 맡긴 편이었다. 가끔 내가 의견을 내면 지리적인 이유로 혹은 여러 상황적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어떤 날은 내가 그의 오답 테스트기는 아닐까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무기력한 시간이 쌓일수록 나 역시 그저 수동적으로 변해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내가 주도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또 plan B도 만들어 놓으니 자신감도 생기고 성취감도 느껴졌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를 위해 운전부터 계획까지 모두 준비해야 했던 남편의 부담감이 느껴져서 미안함이 들었다. 내가 늦게 깨달았지만 이러한 변화를 계기로 앞으로도 서로 솔직하게 생각을 나누고 절충할 수 있는 건강한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 인생은 아주 기니까. 아직도 50년은 더 같이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