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왕고래 Jun 05. 2018

소심한 회사에 다닌다.


심리학자가 바글거리는 회사에 다닌다. 보통 조직에 많아야 한두 명인 그들이 이곳에선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더 특이한 점은 나머지 반이 개발자라는 점이다. 회사의 신조가 ‘심리학과 IT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복도의 벽면이 책장으로 되어 있는데, 《이상심리학》, 《아동발달의 이해》, 《에자일 회고》,《스트레스 휴지통》처럼 눈에 익숙한 심리학 서적과 더불어,《ASP.NET》, 《실용주의 프로그래머》, 《UI/UX의 이해》 같은 열어보고 싶지 않은 책들이 함께 모여 있다. 전혀 다른 분야의 두 집단이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한다. 그 책상이 내 자리다.


본의 아니게 두 집단의 경계에 위치한 탓에 양쪽의 성향을 자주 접한다. 역시나 심리학자들은 소심하다. 그들의 어떤 면은 놀라울 정도로 공통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개발자들도 하나같이 소심하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직원이 소심하다는 얘기다. 첫 출근의 기억이 선명하다.


“자, 여기는 오늘부터 같이 일하게 된….”

“안녕하세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이 날 소개하기 위해 사무실의 적막을 깼다. 덜컥거리는 심장을 숨기려 대범인의 복식 인사를 뱉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상한 건 그들의 반응. 자세히 보고 들어야 알 수 있는 박수 아닌 박수, 인사 아닌 인사가 돌아왔다. 집중하던 업무 탓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평소 목소리의 두 배 크기로 아침 인사를 했다. 하지만 반응은 첫날과 같았다.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는 이는 있으나 같은 크기로 인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숲의 식물들처럼 미세하게 반응했다. ‘안녕하세요’라는 복화술과 함께.


처음엔 의아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깨달았다. 이곳은 적막에 익숙하다. 전화벨 소리와 응대, 업무 질의, 키보드 타이핑 소리, 정문에서 날아오는 택배 아저씨의 고함 소리쯤? 평소 떠다니는 소리를 모아 보면 대충 이렇다. 굳이 밝고 웅장한 톤으로 ‘여러분, 좋은 아침!’을 외친다거나 불특정 다수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다. 출근할 때는 자리 주변의 두세 명과 조용히 인사를 나눌 뿐이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직원과는 가벼운 목례를 한다. 워낙 조용한 탓인지, 목례만으로도 “OOO씨. 좋은 아침! 요즘 별일 없죠~?”라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



드라마 속 사무실은 이와는 상반된 모습을 담고 있다. 책상 숲을 가로지르며 “에블바리 해버 굿데이~”라고 외친다든가 곤두선 얼굴로 “야! 내가 회의록 출력해놓으라고 했지!”라고 소리치는 모습. ‘대범한’ 조직의 모습. 아마도 대부분의 조직은 이 같은 대범함을 지향할 것이다. 열정, 협동, 도전, 혁신 등이 기업에서 좋아하는 덕목이자, 바라는 개개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의 팀장은 어떤 상황이든 능숙하고 현란하게 처리한다. 팀원을 언제 어디에서건 격려하거나 호통칠 수 있다. 팀원들 역시 팀장이나 팀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요령과 제스처를 갖고 있다. 굳이 집중하지 않아도 팀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곳에서 소리가 들리니까.



# 소심인의 고집


소심한 회사에 스며들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소심인의 고집 같은 게 생겼다. 꼭 활발하고 시끌벅적해야 ‘열정, 협동, 도전, 혁신’적인 것일까. 고양된 분위기가 도전정신을 견인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조용하다고 해서 도전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소심한 조직 속에도 저마다의 도전과 실패, 성공과 혁신이 분주히 일어난다.


소심한 사람의 능력은 대범인에 비해 천천히 발현된다. 대범인이 빠른 판단으로 이것저것 도모하고 표현하는 동안 소심인은 좀 더 숙고한다. 내면에서 ‘비위만 잘 맞추는 얌체 생각’과 ‘실제로 영양가 있는 아이디어’를 구분하기 때문. 충분한 고민이 끝나고 그 확신이 망설임보다 강할 때 혀를 움직여 말을 뱉기 시작한다. 당연히, 그들이 모인 조직도 좀 더 오래 생각한다. 느리게 진화한다.


소심한 회사에서 굳이 분위기에 맞춰 광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컨디션이 허락할 때 웃으면 된다. 소모적인 태도를 절약해 좀 더 도전적인 업무를 한다. 표현 및 관계에 능숙한 인기인과, 그런 요령은 없지만 묵직한 끈기를 가진 사람이 구분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견고해진다. 자연이 그래왔듯 자연히 진화한다.




오늘 아침, 옆자리의 직원과 인사를 했다. 그는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그 웃음을 받았다. 우연히 눈이 마주친 누군가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그는 웃지 않았다. 괜찮다. 어제 웃었으니까. 오늘 내가 받은 웃음을 전했으니까.


소심한 회사는 오늘도, 고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