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에 가려진 의미
밤하늘을 바라보며 앉았다.
달무리가 하나도 없는 보름달이 평소보다 가까이 다가와 있다. 어찌나 밝은지 어둠의 신이 필터 하나를 깜빡한 듯, 그 주변으로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와, 오늘 달이 진짜 예쁘다. 보름달이네.”
일출보다는 일몰에, 해보다는 달에 마음을 뺏기는 터라,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입 밖으로 뱉어버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친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건 보름달이 아니야.”
“아니야? 동그랗고 예쁜데…”
“오늘 날짜가 13일이거든. 보름달은 15일에 떠. 자세히 봐봐. 저기 왼쪽 윗부분이 깎여 있잖아.”
그는 이과생이었고 현재 대형 프로젝트 팀의 테크 리더를 할 만큼 똑똑한 인재였다. 허튼소리는 아닐 거라 생각하며 달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달은, 그 달은 정말이지 보름달이었다. 여느 때보다 동그랗고 선명한 얼굴로 빛나고 있었다.
“보, 보름달 같은데…?”
“아니, 그럴 수가 없다고. 문과생 자식아.”
그는 대쪽 같은 면이 있다. 그에 비해 나는 좀 물렁하지만 고집은 좀 있는 편이다. 우리 대화는 엉뚱한 지점에서 엉킬 때가 많다.
"보름달이 아니라면 이렇게..."
"이보게, 문과생."
"이렇게 영롱할 수 없어."
"아니... 들어봐 봐."
"심지어 이건 평소에 보던 보름달보다 강렬해!"
"아니, 하..."
그는 차오르는 화를 한차례 억누르더니 말을 이었다.
“달이 어떻게 빛나는지는 알지?”
“어… 태양이 반사돼서…?”
“맞아. 자전이랑 공전도 알겠지?”
“으응… 이렇게 이렇게 도는 거?”
“그, 그걸 아는 놈이 저게 보름달이라고!?”
“어… 어? 아?”
“초승달이 어떻게 생겼어.”
“초승달…” 나는 초승달 같이 웃는 눈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렇게…?”
“아니, 파인 부분 방향이 어디냐고.”
“어디지? 기억이 안 나네.”
“으휴, 그러니 저걸 보름달이라고 하지.”
“근데 다시 봐도 너무 동그랗지 않아?”
“아니라고! 저기 왼쪽 위가 깎여있다고. 그게 팩트야!!”
그렇게 우리는 보름달로 보이는 보름달이 아닌 달을 보며 한참을 옥신각신 했다.
다음날 우연히 기사를 보았는데 ‘올해 마지막 슈퍼문’이라는 문구가 보였다. 「어제 뜬 슈퍼문의 이름은 '철갑상어 달(Sturgeon Moon)'입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8월마다 철갑상어 낚시를 하는 것에서 유래됐습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친구에게 기사를 공유했다. 그가 잠시 고장 났다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이마를 친다.
“아, 맞네. 제일 중요한 걸 놓쳤네. 달이니까 음력을 따졌어야지."
이어서 마치 아깝게 틀린 수학 문제를 대하듯 자책하며 말했다.
"미안. 팩트가 아니었네."
언젠가부터 ‘팩트’라는 말이 사람들의 입에 자주 담긴다.
'사실'이라는 의미의 영어 '팩트(fact)'는 2010년 경부터 대중적으로 사용되었다. 본래 언론학계에서 쓰이던 전문용어였는데 당시 인터넷상에 근거 없는 주장이나 소문이 늘어 이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그 쓰임이 늘었고, 점차 일상의 범주로 퍼지게 되었다.
팩트는 중요하다. 팩트가 없다면 누군가 그럴듯하게 지어낸 말 몇 마디로 잘못 알거나 손해를 보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다. 잘못된 정보를 일상의 지침으로 삼고 평생을 지낼지도 모른다. 가령 200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밀폐된 방 안에서 선풍기를 켜고 자면 조상님을 만난다고 생각했다. 수년간 팩트는 우리에게 보다 나은 상식 수준을 이끌어줬고 더 입체적인 가치관을 지닐 수 있도록 도왔다.
그래서인지 '팩트'라는 말이 불가침의 영역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감정이나 상상 등 모호한 대화가 이어지면 "팩트야 그거?”, “팩트만 말해."라는 식. 사실이 아니거나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을 무가치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팩트만이 중요할까.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그의 연인 울라이는 그들의 사랑을 주제로 과감한 퍼포먼스를 하여 이목을 끌었다. 예를 들어 <Rest Energy>라는 작품에서는 각자 활과 화살을 쥐고 서로에게 의지하였다. 울라이가 쥔 화살의 촉은 마리나의 심장을 향해 있어 서로의 신뢰나 균형이 무너질 경우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들은 이별하는 순간에도 퍼포먼스를 했다. <The Lovers>라는 이름의 그것은, 만리장성 양쪽 끝에서 출발하여 중간에서 만난 뒤 헤어지는 것이었다. 마리나는 황해, 울라이는 고비사막에서 출발하여 2500km를 걸었다. 90여 일 만에 둘은 만났다. 서로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간다. 이별이었다.
<The Lovers>는 본래 결혼식을 위해 계획한 퍼포먼스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중국의 허가를 기다리는 동안 둘의 관계가 변해 이별식이 되었다. 서로를 안아주며 흘리던 눈물과 아련한 표정에서 그 슬픔의 크기를 알 수 있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22년이 흘렀다.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 마리나는 <The Artist is Present>라는 이름으로 관객들과 약 700시간에 걸쳐 말없이 눈을 마주치는 퍼포먼스를 한다. 룰은 간단했다. 관객은 원하는 시간만큼 앉아 있을 수 있고, 앉아서는 침묵하며 마리나와 눈을 맞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의자에 앉았고, 그녀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그들을 마주 보았다. 다음으로 백발의 남자가 의자에 앉았다. 마리나는 그를 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상대는 울라이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룰을 깼고, 그의 손을 맞잡았다. 둘은 깊은 미소와 함께 서로를 바라본 후 다시 헤어졌다. 이후 인터뷰에서 마리나는 울라이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너는 '다음 관객'이 아니었어.
내 인생이었지.
마치 영화처럼 아름다운 얘기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공연에 대해 서로의 저작권을 주장하다가 결국 소송까지 이어졌다. 그들의 사랑을 다룬 짧은 영상의 댓글엔 이런 팩트들에 대한 얘기들이 가득하다. ‘내 감동 돌려내라’는 웃픈 반응들과 함께. (영상 링크: https://youtube.com/shorts/WeEqzi_TJls?feature=share)
다소 의아하다. 그들의 소송이 팩트면, 그 이전의 이야기들은 거짓이 되는 건가. 그 의미도 사라져 버리는 걸까. 대한민국에 앉아 작은 스마트폰으로 그 이야기를 접한 나는, 만리장성에서 손을 놓으며, 테이블에서 다시 마주 잡으며 그들이 흘렸던 눈물까지 별게 아니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요즘 사람들은 의미(意味)보다 팩트(fact)를 중시한다. 물론 그들 주장대로 팩트 없는 의미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팩트 또한 아무것도 아니다. 가령 팩트로만 보면 밥은 똥의 재료일 뿐이며,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일 뿐이며, 책은 기름때 묻은 종이일 뿐이며, 조용필의 노래는 고막을 흔드는 진동일 뿐이며, 고흐의 그림은 굳은 물감 자국일 뿐이며, 어머니의 눈물도 수소와 산소와 염분의 화합물일 뿐이다. 하지만 삶에서는 백 가지 팩트보다 한 가지 의미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박남일, 《어용사전》中. '팩트'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씨는 ‘인간은 감탄하기 위해 산다’라고 말하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람은 즐거움이 느껴지는 순간에 감탄을 하고 그 감탄이 다시 즐거운 상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팩트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오히려 눈 앞의 진실을 놓치게 될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다가오는 순간들을 검증 위주로만 대하고, 그 안에 있는 여러 의미들을 우주 저편으로 흘려버리는 것이다. 좀 더 음미하여 감탄할 수 있는 계기가 줄어든다. 꽉 찬 보름달이 일그러져 보이기도 한다.
“확실치도 않은 일에 왜 감탄하고 있어.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러게. 시간도 없는데 왜 모든 일에서 팩트를 건지려고 하는가. 습관이잖아 그건.
미래학자들에 따르면 2030년이 되면서 그간 100년마다 두 배씩 증가하던 인류의 지식 총량이 3일에 두 배씩 늘어나게 된다. 늘 이전보다 빠르게 흐르는 세상 속에서, 알아야 할 것들은 이미 충분히 많다.
이따금 몸에 힘을 빼고, 눈에 보이는 대로 감각이 느끼는 대로 바라보면 어떨까. 앞을 가리고 있던 팩트 너머, 조금은 다른 것들이 보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아닐지언정, 내 마음 어루만지는 어떤 것.
달 밝은 밤으로 돌아가서.
설령 그날의 달이 실제로 미완의 보름달이었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아름다운 만월이었을 것이다.
돌아보니, 그때의 대화가 참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