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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Oct 03. 2022

희미한 행복, 선명한 불행



불행을 두려워하지 말고, 행복을 갈망하지 말라.
결국,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쓰라린 것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달콤한 것은 결코 넘치도록 잔을 채우지 않는다.

- Aleksandr Solzhenitsyn



일하다 보면 ‘변수’와 ‘상수’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애널리스트나 빅 데이터 전문가 등, 통계 관련 업무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나는 서비스 기획자다. 개발자와 서비스에 대한 구조나 데이터 흐름 등을 논하다 보면 의례 이 표현을 쓰게 된다. 변수 그리고 상수.


각각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변수는 '어떤 관계나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값으로 변할 수 있는 수'이고, 상수는 '변하지 아니하는 일정한 값을 가진 수나 양'이다. 뭔가 의미가 좀 어려운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변수는 변할 수 있는 것, 상수는 변하지 않는 것.


컴퓨터 모니터를 상상해 보자. 모니터의 스크린 영역은 컴퓨터로부터 수신한, 늘 다른 정보를 출력하므로 변수의 영역이다. 반면에 모니터의 프레임, 베젤, 받침대 그리고 뒷면에 붙은 사양 스티커는 상수다. 변하지 않는(제작 시 변하는 것을 유도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유사한 개념을 사용한다. 예컨대 '30대 남성은 최신 스마트폰을 사용할수록 주관적 안녕감이 높을 것이다'라는 가정으로 수집한 300명의 설문 결과를 분석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데이터에서 각 응답자의 '스마트폰 기종'과 '주관적 안녕감 수준'은 각각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즉 변수다. 설문 결과에 따라 변하는 값이기 때문이다. 300명 데이터에서는 최신폰의 비율이 34%지만 추가로 200명을 더 설문하면 33% 또는 35%가 될 수 있다. 32%도 될 수 있다. 여튼 변한다.


하지만 몇 명을 더 설문하든 '나이대'와 '성별'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세팅하고 설문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30대 그리고 남자. 상수다. 내가 업무 시 사용하는 변수와 상수라는 용어도 개발 언어 상의 표현이긴 하지만 그 의미는 같다. 상황에 따라 값이 변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


"여기 좌우측 콘텐츠는 상수라는 거죠? 이쪽 브랜드 항목은 변수고."


일상에서 잘 사용하지도 않는 용어들을 언급하는 까닭은, 행복과 불행 중 어떤 것을 변수 또는 상수로 두는가에 따라 그 '일상'에서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삶 전반에서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다는 점에서는 행복이든 불행이든 변수가 맞다. 로또에 당첨된다거나 교통사고가 난다는 걸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일상에서는 다르다. 예측 가능한 사건들이 꽤 많다. 반복되는 매일을 나열하고 그 단면을 잘라보면, 마치 '30대 남성'이나 '모니터 뒷면의 사양 스티커'처럼 고정적으로 존재하는 사건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들의 일부를 변수로, 또는 상수로 두곤 한다.




#. 행복을 상수로 두려는 이유


시간은 무한할지언정, 하루는 유한하다. 24시간 내에서 행복하거나 불행한, 웃기거나 슬픈, 만족스럽거나 아쉬운, 혹은 별생각 없이 흘러가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한다.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래서 나는 월요일인 오늘을 행복하게 보낼 참이다. 월요병을 없애려면, 점심엔 내가 좋아하는 태국 음식점을 가야겠다. 요즘 왠지 태국 음식이 땡겼어. 음, 뭔가 부족한데... 저녁엔 친구를 만나서 치킨에 맥주 한잔해야지. 좋군!

행복한 하루를 에너지 삼아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좁은 공간을 꽉 채운 이산화탄소와 함께 1시간이 남짓의 시간을 이동한다. 다운되는 기분을 가까스로 끌어올린다."


그런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행복을 상수로, 불행을 변수의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게 뭔 갯벌에서 고구마 캐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따져보니 그렇다. 일상에서의 행복이 변치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고갈되지 않고 유지되도록, 마치 할당량을 채우 듯 오늘을 대한다. 잘 보낸 하루들이 모여야 '인간답고 행복한 삶'이 될 것만 같아서다. 실패한 오늘을 그곳에 쌓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오전 11시. 주간보고 시간에 내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속도를 더 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 부장은 자신이 중간에 방향을 틀어서 지연됐다는 건 까맣게 잊은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 표정이 딱히 성에 안 찾는지 4절, 5절, 6절까지 했더랬다.

그 덕에 점심을 늦게 출발했다. 태국 음식점의 자리는 만석이어서 다른 걸 먹어야 했다. 하... 그래도 식당으로 가는 길의 햇살과 바람은 여전히 좋았다. 오늘의 첫 행복이다."


변수와 상수의 가장 큰 차이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행복을 통제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 기준이 온전히 내 것일 수 없어서다. 내가 태어난 곳의 문화, 그리고 주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오늘 제시간에 출발해서 맛있는 태국 음식을 먹었겠지. 아니, 그 누군가는 이렇게 시간 압박도 없이 원하는 시간에 여유 있게 식당을 향했을 거야. 아직 붐비지 않은 그곳에서 제일 맘이 가는 테이블에 앉았을 거고, 당연히 음식도 빨리 나왔겠지."


행복은 감정의 영향을 받는 상태이기도 하다. 기분 더러우면서 행복하기란 어렵지 않나.


그런데 따져보면 일상 대부분의 시간은 그다지 즐겁지 않다. 물론 불현듯 출근 길이 좋을 때가 있다. 신바람 내며 일을 할 때도 있다. 퇴근길에 묘하게 설레고 감사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순간에 존재했던 고유한 경험이다. 반복되는 동일한 시간 동안 나는 딱히 환희에 차 있지도, 행복에 겨운 안녕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바빠서 그렇다. 그다지 안락하지 않은 시간들이다.


“퇴근길 지하철. 오늘따라 유독 사람이 많다. 생각해 보니 어제도 많았다. 문득 이 고통이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끼친다. 이대로 부정적인 기운이 스미게 둘 수는 없다. 곧 친구를 만날 텐데, 이곳의 좋은 점을 찾아보자. 그래, 이 냄새 그리고 저 회색빛의 사람들. 이 도시에서 오늘도 노력한 이들의 풍경이다."


행복한 기분을 위한 일정을 의도적으로 일상에 배치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서 기대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의도적인 상황 자체가 행복에 대한 성과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더 좋은 선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자연스레 다가오는 만족감 마저 놓치기도 한다. 선택의 결과는 SNS의 사진처럼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회전 초밥처럼 실시간으로 다가와 지나쳐 간다. 내가 행복을 느끼기 위해 애쓰는 순간에도 레일 위에서는 다른 선택들이 가능성을 남겨둔 채 흘러가는 셈.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려 돌아오지 않게 될지도.


“기다리던 친구와의 저녁 식사. 그런데 이 친구,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며 죽상을 하고 있다. 나까지 덩달이 기분이 쳐진다. 재밌는 얘기를 해보려 시도했지만, 결국 친구의 푸념으로 덮이고 만다. 소중한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다니. 탐탁지 않다.

나는 결국 친구와의 자리를 예상보다 빨리 정리했다. 집으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더 따고 미드 정주행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에 담기지가 않는다. 어두웠던 오늘이 어디선가 날 보고 있다.”


행복을 상수로 두려는 것은 그 외의 모든 시간은 변수가 된다는 의미다.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고, 내가 기대한 시간이 아니므로 행복과는 거리가 있어 뵌다. 마치 불행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변수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것만 같다.


이 불규칙한 불행들이 자꾸 주변을 맴돌게 된다.





#. 행복을 변수로, 불행을 상수로


언젠가 결혼한 선배가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결혼 생활을 잘하려면 매일 똥 한 숟가락씩 먹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단다. 때로는 작은 티스푼이고 이따금 큰 국자라고. 다소 진지한 표정의 농담이었다.


글쎄, 결혼 생활을 안 좋게만 희화하는 건 딱히 반기지 않지만, 이 농담에는 일상에 대한 꽤 그럴듯한 철학이 담겨있다. 불행을 상수로 두었다는 점이다. 고정된 행복을 갈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치 않는 불행을 곁에 두고, 적과의 동침을 하는 것.


"오늘도 박 부장이 내 자존감을 깎아먹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겠군."


출근 후 책상에 앉으며 이런 생각을 하면 마치 일상 전반의 만족을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따져볼 문제다. 박 부장의 예의 없는 지적과 행동들은 나에게 어떤 행복도 줄 수 없는 게 맞다. 예상치 못하게 그런 일을 겪은 후 곱씹으며 심연으로 들어갈 바에야 내가 그런 일상의 결을 미리 예측하고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가 지옥의 숨결을 뱉는 월요일이다. 어디 보자, 오늘의 불행은 뭐가 있을까. 주말 휴식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출근길의 몸이 무겁네. 일단 11시에 있는 주간보고를 잘 끝내자. 박 부장이 오늘도 게거품 물고 똥 같은 말들을 쏟아낼 게 분명하다.”


행복이 상수인 일상과 마찬가지로, 불행을 상수로 둔 일상에서도 그 외 모든 시간이 변수가 된다. 그것들이 모두 행복감을 주는 사건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할 가능성도 현저히 낮다. 대부분의 불행을 이미 정해두어서다.


내가 정한 일들을 겪게 되므로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라며 자책할 필요가 없다. 채워야 할 행복이 없으므로 변수의 시간을 힘 빼고 흘려보내도 불편감이 없다. 부담이 없으니 자연스레 찾아오는 만족감을 알아채기도 쉽다. 안락한 일상. 이따금 설렘도 있다.


"하... 회의를 망쳤다. 이런 게 똥망이라는 건가… 음? 근데 이 푸팟퐁커리는 정말 맛있네."





#. 행복을 변수에 두려면


행복을 변수 그 자체로 두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기대와 내 기준을 분리해야 한다. 사회는 나에게 "당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OO해야 한다"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도달하지 못하면 마치 뭔가 결여된 삶이 되는 것 같은 뉘앙스를 남긴다. 굳이 비교하며 그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을 짚어낼 필요는 없다. 큰 문제가 없어 안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다.


나에게 존재하는 다양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하다. 부정적인 감정이라 할지라도 내가 겪고 있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균형 있게 받아들이는 것. 그렇게 하면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더 많이 알아챌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타인의 부정적 감정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 소통과 공감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보니,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물러서면 정이 좀 없는 것 같은 느낌인데, 타인의 불행을 함께 곱씹으며 휩쓸리는 것보다는 그 경험 자체를 정상화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한다.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불행을 포함하여 다가오는 일들을 그대로 잘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 스스로 그렇게 지내는 것이다.




# 행복이 상수가 되는 순간


행복은 사건의 순간에 경험하기보다는 그 전후에 느끼는 설렘과 만족감에 가깝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바쁘고 고된 하루의 끝, 잠들기 전, 에너지가 남는다면 오늘의 좋았던 순간을 다시 짚어본다.


혹여 홀로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상황을 만난다면, 그렇게 문득 스스로를 쓰다듬어주고 싶은 순간에 다가섰다면, 그때는 행복을 상수로, 불행을 변수로 두겠다. 단단하고 변치 않는 불행과 함께 매일 고생했을 나를 바라보며 위로하련다.


잘했어. 고생했다. 정말 잘하고 있어,라고.

그 안에서 하루 한 걸음씩 묵묵히 성장해 준 나를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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