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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Oct 17. 2022

행복 말고, 회복


처음으로 강렬함을 남겼던 게임은 ‘손노리‘ 제작사의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였다. 물론 그전에도 ‘킹콩, 남북전쟁, 고인돌, 페르시아 왕자 등’ 좋은 추억의 많지만, 마치 첫사랑처럼 내 몸의 모든 세포를 깨운 존재는 이것이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 주인공인 '로이드'와 '일레느', 그리고 명검을 가진 '핫타이크'와 같은 이름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 속에 있는 이유다. 나는 게임을 참 좋아했다.


게임 인생을 살면서 <퍼스트퀸4>과 같은 인생 게임을 만났고, '다크세라핌, 이스II스페셜, 랑그릿사, 창세기전, 대항해시대, 조조전, 영걸전, 와룡전 등’ 수많은 명작을 플레이했다.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어느 날 ‘머드 게임’이라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의 온라인 게임 시대가 열린 것이다. 머드(MUD)는 Multiuser Dungeon(dimension)의 약자로, 머드 게임의 의미는 ‘온라인상에서 다수의 유저들이 동시에 즐기는 게임’를 의미한다. 하지만 당시 나와 친구들은 ‘마치 진흙(mud)에 빠지듯 점점 더 매료되는’ 게임으로 이해했다. 그만큼 재미있었다.


처음엔 '한게임 테트리스'나 '포트리스'와 같은 2D형 게임들이 주를 이뤘지만, '리니지, 델타포스, 레인보우식스'와 같은 게임들이 나오면서 나를 포함한 게이머들은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 모니터 속에 새로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 말고도 살아있는 존재 말이다. 짜인 각본대로만 말하는 캐릭터들이 아닌.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그해 리니지와 같은 MMORPG(여럿이 같이 즐기는 롤플레잉 게임) 장르가 출범하면서 원하던 대학에 떨어진 이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뮤, 라그하임, 라그나로크, 프리스톤 테일, 카발 등'의 게임에 매진했다. 종착력은 <월드 오프 워크래프트(일명 '와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른 살 전까지는 그래도 게임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워크래프트3의 유즈맵인 <카오스>에 미쳤었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는 회사 동료들과 <리그 오프 레전드(일명 '롤')>을 하곤 했다. 롤은 실력이 낮은 유저에게 부모님의 안부와 성장 배경을 묻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그 질문을 받지 않기 위해, 바쁜 일상을 쪼개 열심히 했었더랬다.


아- 떠오르는 게임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당시가 떠오르며 마음이 설레고 기분이 고양된다. 그만큼 게임을 좋아했다. PC방을 차리는 꿈을 꾸기도 했다. 24시간인 하루 중 48시간 게임을 하던 시절. 인간이 되기 위해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일면 그리운 시간임은 분명하다. 서른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토록 찬란했던 게임 인생도 잠정적 휴업에 들어갔다.



들떠서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하려던 얘기는 이것이다. 많은 게임을 하다 보니, 여러 게임상에서 늘 비슷한 역할의 캐릭터들을 보게 된다. 그중 두 가지 대표적인 역할을 꼽자면 ‘탱커’‘딜러’다. 적을 물리치기 위해 이 두 가지 역할은 매우 중요한 상호보완성을 갖는다.


탱커의 역할은 ‘버티는 것’이다. 아군 진영의 최전방에서 적들의 무자비한 매질에 두들겨 맞는 일을 한다. 동시에 후방의 아군들이 안전하게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셈이다. 그래서 탱커는 방어력과 체력의 수치를 높이는 게 중요하다. 높은 방어력은 동일한 피격에도 적은 체력을 소모시키고, 높은 체력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딜러의 역할은 ’공격하는 것‘이다. 탱커가 만든 벽으로 인해 쾌적해진 후방에서 큰 방해 없이 공격을 하며 최대한 빠르게 벽 앞의 적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따라서 딜러에게 중요한 요소는 공격력과 민첩함이다. 공격력이 높아야 한 번으로 공격으로도 더 큰 피해를 입힐 수 있고, 민첩함이 높아야 공격 속도가 올라서 같은 시간에도 더 많이 공격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역할을 삶에도 대입해 볼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탱커와 딜러에도 서로 다른 역할이 있는 셈이다.


탱커는 매일 다가오는 일상을 살아내는 역할을 한다. 주어진 규칙 내어서 반복되는 사건들과 고난, 스트레스를 견디며 맡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내가 시간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속적으로 나에게 다가와서는 지나쳐 갈 뿐이다. 그러므로 일상을 온전하게 서서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탱커의 역할은 충분하다. 이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 기초 체력, 의연하고 담담한 태도, 주변에 크게 휩쓸리지 않는 중심이 중요하겠다.


딜러는 다가오는 일상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목표와 동기를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크게는 가치관이나 인생의 목표일 것이고, 작게는 하루의 계획을 짜는 것이다. 그렇게 다가오는 일상이 좀 더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조타기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방향을 설정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효율을 만든다. 따라서 이 역할을 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막연하되 장기적인 목표와 실현 가능한 단기 계획을 짜는 것도 그렇다. 그 계획을 실현하는 탱커를 응원하고 독려하는 태도, 전방의 상황에 따라 방향이나 계획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판단력이 필요하다.


두 캐릭터가 역할을 잘하면 시너지가 증가하겠지만, 게임을 하다 보면 그렇지 못한 상황들이 이따금 발생한다. 예컨대 탱커가 자신의 능력치를 공격력에 높게 투자해둔 경우다. 사력을 다해 제 역할을 하려고 해 봐도 낮은 방어력과 체력 탓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뻗어버린다.


반대로 체력에 ‘몰빵’한 딜러도 있다. 그만큼 낮아진 공격력으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적의 체력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적이 쌓여간다. 만약 이렇게 ‘오래 버티지 못하는’ 탱커와 ‘공격력이 약한’ 딜러가 하나의 팀으로 던전에 들어간다면, 보스의 얼굴도 구경 못하고 마을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약 일상의 모든 상황에서 딜러처럼 목표와의 거리를 재면서 행복과 좌절을 반복하고, 정작 미래를 숙고해 볼 수 있는 시간에는 탱커처럼 우뚝 서서 흘려보낸다면 어떨까. 더 무료하고 빨리 지치는 일상이 될 것이다. 막막하고 모호한 삶에 다가선다. 게임에서도 그렇듯, 역할에 맞는 능력치가 필요하다. 일상은 탱커의 단단함으로 버티고, 스스로를 깊이 바라볼 수 있는 시간에 딜러가 되어 적극적인 공격을 하는 것.



이쯤에서 반전이 하나 있다.

두 역할만 잘 맞으면 완벽할 것 같지만, 막상 게임 마니아들에게 “탱커랑 딜러들 모였으니 던전 출발할게요.”라고 하면 “장난하심?”이라는 답변을 받게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존재가 빠졌기 때문이다. 사실 아군의 후방 진영엔 딜러만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옆에 다른 역할의 캐릭터가 서있다. 바로 ‘힐러’다.


힐러의 역할은 ‘회복하는 것’이다. 탱커의 체력이 떨어졌을 때 치유 스킬을 발동하여 그것을 다시 채워준다. 이로 인해 많은 적들의 공격에도 탱커가 더 안정적으로 오래 버틸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아무리 방어력과 체력이 높은 탱커인들, 언젠가는 그것이 바닥나서 쓰러지고 만다. 탱커가 쓰러지면 당연히 적들이 후방으로도 밀고 들어오겠지. 그러면 딜러는 어? 아? 하다가 그 무리에 밟혀 죽을 뿐이다. 그냥 멸망이다.


특히 고레벨의 거대 몬스터를 잡으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을 들이며 버텨야 한다. 심지어 몬스터의 태산 같은 몽둥이질 한방에 탱커의 거의 모든 체력이 바닥나기도 한다. 이때 힐러가 “치유의 빛!”이라며 그것을 다시 가득 채워주는 것이다. 작고 하찮은 인간 무리를 얕봤던 몬스터가 적잖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딜러들이 “용의 콧김!” 하면서 공격을 퍼붓는다. 그런 순간이 반복되면서 보스 몬스터의 체력은 점차 바닥을 향해 간다. 그래서인지 힐러의 중요성은 레벨이 오를수록 증가한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생의 초반부에는 많은 것들을 직접적으로 겪고 이겨내는 탱커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점차 성인이 되면서 나의 기호와 가치관이 생기고 딜러의 역할이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나의 인격이 형성되고 나면 가장 중요한 역할은 힐러가 된다. 숨 돌릴 틈 없이 고난이 몰려들 때,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을 맞닥뜨렸을 때, 오래도록 준비한 일이 실패했을 때, ‘치유의 빛’을 쓸 수 없다면 아무리 강한 탱커와 딜러가 있더라도 무너질 수 있다.


스스로 회복하는 능력.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복탄력성'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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