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이번 참에 누가 더 센지 결정하자!"
먼 옛날, 들짐승과 날짐승 사이에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다. 서로가 더 세다고 우기던 차에 일어난 일이다. 박쥐는 어느 편에 설지 고민이었다. 날개가 있지만 부리가 없고, 다리가 있지만 땅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 눈치를 잘 보다가 이기는 쪽으로 붙자.'
어느 날 싸움의 승기가 들짐승에게 기운 것 같았다. 박쥐는 사자에게 찾아갔다.
"사자님, 저를 보세요. 쥐와 닮았지요. 그러니 들짐승이랍니다. 같이 싸우게 해 주세요."
사자가 박쥐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날짐승이 대반격으로 들짐승에게 위기가 닥쳤다. 이들은 하늘에서 마구 떨어지는 돌과 나무 조각을 피해 숲 깊은 곳으로 숨었다.
처지를 걱정하던 박쥐는 결국 날짐승의 왕 독수리를 찾아갔다.
"독수리님, 이 날개를 좀 보세요. 저도 날짐승이랍니다. 함께하게 해 주세요."
"오냐, 그렇게 해라."
독수리는 못마땅했지만 이내 허락했다. 그 후로도 고통스러운 싸움이 지속되었고, 두 집단은 지치고 말았다. 결국 화해를 했고, 평화가 찾아왔다.
문제는 박쥐의 신세였다.
"넌 부리도 없고 알도 못 낳잖아. 들짐승 주제에 어딜 감히 여길 와?"
날짐승들은 박쥐를 내쫓았다. 박쥐는 들짐승들에게 갔다.
"장난쳐? 날개가 있으면 당연히 날짐승이지."
들짐승도 박쥐를 무리로 들이지 않았다.
두 집단 모두에게 배척당한 박쥐는 어두컴컴한 동굴 속으로 숨어들었다. 밤에만 돌아다니게 되었다.
불쾌함이 먼저 찾아올 것이다. 그 부정적 의미 때문이다.
박쥐 같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따져서 선택한다
비슷한 표현으로 ‘철새 같다'가 있는데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철새는 이리저리 쉽게 옮기는 행동을 비하하는 것이고, 박쥐는 주로 대치중인 관계에서 자기 이득만을 취하려는, 소위 기회주의자를 가리킨다.
그런데 자신의 이미지가 이런 식으로 소비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박쥐 입장에서 꽤나 억울할 지도 모른다. 철새는 실제로 이곳저곳을 이동하기라도 하지, 박쥐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습하고 어두운 동굴의 천장에 붙어 지낼 뿐이다. 밤에만 조용히 나와서 곤충과 열매를 먹는다. 딱히 주변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데, 그 모습 때문에 이런 이야기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날개가 있지만 조류가 아니고, 이름에 쥐가 있지만 쥐류와는 전혀 다른 종이다.
박쥐는 새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포유류다. 심지어 대부분의 새보다도 비행을 잘한다. 새들은 벌새와 같은 특수한 종을 제외하면 정지비행은 커녕 착륙도 잘 못해서 둥지로 날아오다가 자신의 알을 깨먹곤 한다는데, 박쥐는 부드러운 피박 형태의 날개 덕에 섬세하고 다양한 비행이 가능하다.
또한 극소수의 종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유익한 존재다. '박쥐는 자연이 낳은 가장 강력한 살충제'라는 표현이 있다. 미국 텍사스 주 브라켄 동굴에 사는 2,000만 마리의 박쥐 무리는 하룻밤 사이에 200톤의 곤충을 먹어치운다고 한다. 한 시간에 홀로 1,000마리의 모기를 잡아먹는 종도 있다. 심지어 박쥐는 배설물도 비료부터 음식까지 그 활용도가 높다.
이 같은 많은 역할들 덕에 박쥐가 농업 분야에 기여하는 가치는 북아메리카지역에서만 연간 50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 결과가 있다. '인류의 진화에 통찰력을 주는 영장류, 산소를 만들어내는 식물 플랑크톤, 지구의 청소부 곰팡이, 꽃가루를 옮기는 벌'과 함께 '지구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동식물'에 포함되기도 한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도 인류를 위해 묵묵히 일을 하는 셈이다. 마치 다크나이트처럼.
날짐승과 들짐승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우화는 이기는 무리에 편승하기 위해 애쓰는 박쥐를 간사한 듯 묘사했지만, 나는 그 모습이 오히려 치열하게 느껴졌다. 쉽게 주류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최선의 선택을 위해 이리저리 발품을 파는 모습이 인간의 삶과 딱히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원하는 걸 얻으려 이곳저곳에 인생을 걸었던 내가 보인다.
그 과정에서 무리에겐 있고 나에겐 없는 것들을 알게 된다. 분통하다가 슬프고, 억울하다가 막막해지는 감정을 겪는다. 어느 날 그들의 일부가 되기 위해 타고난 나의 형상을 구겨 본다. 날개는 몸 어딘가에 붙어버렸고, 코와 입은 딱딱한 부리가 되어 있다. 박쥐의 신세와 다르지 않다.
박쥐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말이다.
언젠가 다큐멘터리에서 박쥐의 출산 장면을 보았다. 그 모습은 모든 상상을 초월한다. 어미가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새끼를 낳기 때문이다. 딱히 돕는 이도 없이, 천장을 두 발로 움켜쥐고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새끼를 밀어내야 한다.
마치 꽃봉오리가 열리듯 빨간 새끼가 모습을 드러내고 아주 천천히 밀려 나온다. 그렇게 긴 시간 애를 쓴 후에야 새끼의 몸이 완전히 빠져나온다. 그런데 어미의 몫이 끝난 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저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미 사력을 다했지만 남은 생명력을 쥐어짜서 새끼를 날개로 받는다. 그렇게 한 생명을 온전히 감싸 안은 후에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이 모든 과정은 어미 혼자 이뤄내는 일이다.
만약 박쥐가 자신이 태어나는 과정을 보았다면, 날짐승과 들짐승 두 무리의 기준으로만 스스로를 평가하진 않았을 것이다. 박쥐에 대한 세간의 부정적 편견들 따위 가볍게 무시했으리라.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들짐승에겐 없는 날개로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날짐승에겐 없는 섬세한 귀로 소리를 듣고 이빨로 음식을 씹어먹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존재보다 숭고하게 태어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