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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왕고래 Mar 04. 2024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전화기

새로운 소통의 시대가 도래했다 V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을 만나러 나갔는데 그중 한 녀석이 신기하게 생긴 걸 얼굴에 대고 있었다. 갈색 같기도 황금색 같기도 한 그것은 집에 있는 무선전화기와 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아래쪽에 플립형 커버가 있어서 그것을 열어야만 숫자판이 보이는 게 달랐다.


"걸면 걸리는 걸리버!"


그게 뭐냐고 묻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외쳤다. 묻기 전부터 외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사실 그가 들고 있던 게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티브이 광고에서 자주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걸리버'라는 이름의 물건이었고, 그것의 가격은 비쌌고, 그것은 휴대폰이었다.


친구는 딱히 전화가 오지도 않는데 걸리버의 안테나를 뽑더니 오른손 중지로 플립 커버를 튕겨 열고는 그것을 얼굴에 갖다. 그리고는 “어, 그래. 나 지금 바빠서. 어, 알겠어”라고 말했다. 잊을만하면 그 행동을 반복했다.


당시 나는 삐삐의 가성비가 더 좋다고 믿고 있었기에 그 행동이 딱히 얄밉거나 부럽지는 않았다. 부모님께만 허락된 듯한 물건을 갖고 있는 그가 좀 더 어른에 더 가까워 보이긴 했다. 마치 딱 맞지 않는 아버지의 재킷을 입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원할 때 어디로든 연락할 수 있다는 건 신기했다. 회사원도 아닌데 그렇게 급하게 연락할 데가 있나. 전화 요금도 엄청 비싸다던데 저걸 어디에 써, 라고 생각했다. 돌아보니 그건 부러움이라는 것이었다.



전화기를 휴대하는 시대


리는 리버라니. 왜 이런 슬로건을 썼을까. 사실 걸리버는 최초의 휴대폰이 아닌 2세대(2G) 폰이다. 휴대폰은 지금의 5세대(5G)에 오기까지 세대별로 기술적인 진화를 거듭했는데, 최초의 휴대폰인 1세대 폰은 아날로그 기반의 통신 기술을 사용했으며 굉장히 크고 무거웠다. 어쩐지 잠수함 어딘가의 부품을 뽑아온 느낌이랄까. 1세대 휴대폰은 무엇보다 내가 어떤 장소에 있는가에 따라 통화가 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기에 대중화되지 못하고 특수한 목적을 가진 경우만 사용했다.


1세대 휴대폰 (모토로라 다이나텍 8000X)



1990년대 후반에 등장한 2세대 폰들은 디지털 통신 기술을 적용한 최초의 휴대폰이었다. 디지털 방식은 이전에 비해 통화의 품질을 월등히 높였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장소에서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걸면 걸린다'라는 걸리버의 슬로건 역시 이런 기술력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다. 전과는 달리 전화를 걸면 문제없이 걸린다는 것이다. 당시 삼성에서 만들었던 '애니콜(어디에서든 걸린다)' 역시 같은 콘셉트로 지어진 브랜드명이다.


2세대 폰을 달리 부르는 'PCS(Personal Communication Service)'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그때를 기점으로 누구나 실생활에서 휴대폰을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다양한 제조사에서 이 엄청난 시장에 뛰어들었고, 걸리버와 애니콜뿐만 아니라, 모토로라의 스타텍, 팬텍의 스카이 등도 큰 인기를 누렸다.


* TMI: 1세대와 2세대 사이에서 ‘시티폰’이라는 통신 기기가 잠시 반짝했었다. 전화를 받을 수는 없고 걸 수만 있는 휴대폰인데 그 마저도 공중전화 근처에서만 걸 수 있다. 이 폰은 당시 삐삐를 받고 공중전화로 몰려가 줄을 서야 했던 상황의 갈증 해소에 집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공중전화에 가기는 가되 줄 서서 기다리지 말고 (시티폰으로) 삐삐 음성을 확인하거나 호출한 곳에 전화를 하라는 의미다. 시티폰은 당시 어려서 뭘 몰랐던 나에게도 크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만약 휴대용 폰이 나온다면 그것은 '휴대성'과 '기존의 집 전화기'의 역할을 모두 품어낼 때에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전화기


나는 친구의 걸리버 자랑질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1998년 어느 봄에 애니콜의 SPH-3100 모델을 얻게 되었다. 그것이 후줄근한 내 바지의 오른쪽 주머니에 존재하시게 되면서, 나는 신인류이자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마치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듯 걸음걸음에 힘이 실렸다. 울리지도 않는 그 녀석을 꺼내서 중지로 플립 커버를 열고 "여보세요~? 어? 나 지금 학원가는 길"과 같은 매소드급 연기도 했다. 자다가도 그 녀석을 보면, 웃음이 났던 것 같다.


휴대폰으로 인해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절차를 거치거나 허락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친구의 부모님에게 바꿔달라고 할 필요도, 대답 없는 삐삐 사서함에 뭔가를 남길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필요할 때 친구의 전화번호를 누르면, 그는 그곳에 있다. 이는 단순히 언제 어디서나 멀리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술적 진화를 넘어, 누구나 자신만의 즉각적이고 독립적인 소통 공간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1997년, 이렇게 휴대폰은 성공적으로 대중화되었다. 한데 그로부터 100년 전인 1986년, 덕수궁 및 정부 부처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가 설치됐다. 그렇게 한반도를 찾아온 후 딱히 밖을 나서지 못하고 집에만 콕 박혀있던 전화기는, 100세가 되던 해에 창문을 넘어 도망쳤다. 이 사랑스러운 노인은 그렇게 모든 사람의 손에 담기며 휴대폰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개인이 휴대하는 전화기라니, 여러모로 놀랍고 멋진 시절이었다. (아... 잠시 추억여행)


삼성 sph-3100


2세대 휴대폰의 또 다른 혁신은 문자 메시지(SMS) 기능이었다. 공중전화까지 가지 않아도 상대방의 휴대폰으로 삐삐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숫자가 아닌 문자로 보낼 수 있다! 전화 통화에 비해 월등히 저렴하다는 이점, 그리고 '40자 제한'이라는 규칙은 대중을 보다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으로 이끌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있어 이 가성비 좋고 간편한 소통 수단은 너무나 매력적이었고, 잦은 '문자질'로 인해 눈보다 엄지가 빠른 이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노룩으로!) 그래서 통화료는 거의 안 나오지만 문자메시지 비용만 수만 원씩 나오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집으로 그 청구서가 도착하는 날, 수많은 어린 영혼들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어야 했다.


이처럼 요금 폭탄 사건으로 폰을 빼앗기거나 가입을 해지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면서, 통신사는 '문자 100개 무료'와 같은 조건형 요금제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폭넓은 무료 요금제들은 이처럼 절제력이 부족한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 땀, 눈물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내 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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