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청개구리가 될까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린 왜 하지 말라는 것에 주의를 뺏길까요.
제주도 서귀포 인근 중문 관광단지 안에 ‘여미지’라는 식물원이 있습니다. 지금은 인기가 다소 시들해졌지만, 여전히 제주를 대표하는 관광명소 중 하나입니다. 사진 속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식물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까닭에 유소년들에게는 학습의 장이기도 하지요.
세계 각 지역의 희귀 식물들이 기후별로 구분된 예닐곱 개의 방 속에서 숨 가쁜 밀도를 이겨내며 방문객들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식물들을 괴롭히는 것은 여유롭지 못한 공간만은 아닙니다. 하지 말라는 일을 꼭 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생채기’는 이 곳 식물들을 더욱 괴롭힙니다. 어느 방이든 출입구 언저리에 낯설지 않은 문구를 새긴 팻말이 서 있습니다. ‘식물사랑 낙서하지 맙시다’
다소 의아합니다. 식물에 낙서를 하지 말라니요. 문구대로라면 식물에 낙서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덧붙인 팻말을 두고 볼 때, 추억을 가슴이 아닌 식물의 몸 위에 새기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출처 : http://www.kormedi.com/news/culture/it/1186647_2968.html
공동의 자산을 이런 식으로 사유화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앞에는 금지 팻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분명 '마시오'라고 적혀있는데, 그들에겐 반대로 읽히나 봅니다. 그들이 '마시오'라 쓰고 '하시오'로 읽는 이유는 그 메시지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당신은 하고 싶다.
2. 이미 하는 사람이 있다.
1. 당신은 하고 싶다. (동기적 반발 심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위협받는 자유를 회복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던, 또는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행위를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인지할 때 나타나는 심리적 반발입니다. 예컨대 4~6세 아이들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도 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기를 쓰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성인들은 사고의 수준이 아이들만큼 단순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금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시도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규범의 사각지대라던가 범위가 좁은 맥락에서는 아이들과 다름없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는 간판 밑에는 거짓말처럼 쓰레기가 쌓여 있습니다. 애인은 꼭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합니다. 회의 중 반대를 받은 의견을 기어코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오늘 술 마시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 말 떨어지기 무섭게 술 생각이 납니다. 맘에도 없었는데 말이죠. 이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 동기적 반발 심리의 영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이미 하는 사람이 있다. (암묵적 동의)
일반적인 의미의 암묵적 동의는 '특정 행위가 어떤 것에 대한 동의를 포함할 때'를 나타냅니다. 여미지 식물원의 예로, 사람들은 낙서를 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낙서를 금지한다'는 메시지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지는 정반대의 관점에서도 암묵적 동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낙서를 하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 말이죠. 그 메시지를 보거나 듣는 사람들은 모두 '실제로 낙서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게 됩니다. 즉, 금지 팻말의 메시지는 달리 읽힐 수도 있습니다."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당신은 안 돼요."
위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없게 된다.'라는 사실, 심지어 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는 행위를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낙서금지 팻말을 굳이 곱씹으면서 내면의 반발 심리와 이 악물고 싸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린 이미 문화적인 규범을 충분히 학습했으니까요. 팻말을 주의 깊게 볼 일도 없거니와 설령 보게 된다해도 그 뒤에 있는 낙서에 혀를 찰 사람들이 더 많겠죠. 그러나 낙서를 했던 사람들에게는 다릅니다. 그중 일부는 차라리 팻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설령 이런 역효과가 있다고 하더라도 팻말을 뽑아버릴 순 없습니다. 금지 팻말은 단순히 어떤 행위를 방지하는 것 외에, 더 강력한 규제의 전 단계 역할도 하기 때문이죠. 만약 팻말의 고요한 절규에도 불구하고 낙서가 늘어난다면, 그곳엔 '적발 시 벌금 10만 원'이라는 문구가 추가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접근을 제한하는 울타리, 감시카메라, 나아가 관리인까지 생기겠죠. 이처럼 규제는 그 덩치가 커지는 만큼 일 처리도 화끈하지만 꼭 좋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곳을 지나는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굳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문제로 인해 불편을 겪기 때문이죠. 이게 최선인 걸까요.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금지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선 금지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갖고 오기도 합니다. EBS 다큐프라임 <인간의 두 얼굴>에서는 이와 관련된 재밌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무단 쓰레기 투척으로 골머리를 앓는 골목이 있습니다. 양심에 호소하는 거울과 벌금 경고문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인근 주민들은 그곳에 쌓인 쓰레기의 악취와 미관 문제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딱히 해결할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마치 낙서된 나무 앞의 낙서 금지 팻말 같네요.
제작팀은 그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합니다. 일단 벌금 경고문을 제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화단으로 꾸몄습니다. 작업 도중 그곳을 지나던 주민 대부분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여러 규제를 해봤지만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화단을 완성한 후, 관찰 카메라를 통해 쓰레기가 다시 쌓이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8시가 되었고, 그곳엔 단 한 개의 쓰레기도 없었습니다. 지난밤에 녹화된 영상을 돌려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평소처럼 그곳에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 쓰레기를 갖고 갔습니다.
이 실험은 상황의 힘이 인간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조지 켈링' 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이렇게 꽃을 심고 땅을 가꾸면 이곳은 누군가가 소유한 곳으로 보이죠. 신경 쓰는 장소로 보이면 사람들은 그곳을 존중하게 됩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금지하기에 앞서 그 존재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려는 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미지 식물원의 나무들은 관광객에게 일시적으로 지나치는 장면에 불과합니다. 당연히 그것과의 심리적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존중하기도 어렵겠죠. 만약 금지 팻말 대신 <이 나무들 사이에도 엄마와 자식이 있습니다. 당신의 가족과 같습니다.>와 같은 문구가 적혀있다면 어떨까요. 좀 더 거리를 좁히고 그것들을 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금지 팻말보다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의 통로에 화단을
우리는 애인이나 자녀에게 '하지 말라'는 말을 너무 쉽게 뱉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앞서 언급했던 두 가지 의미가 담기겠죠. 하고 싶지? 딴 사람은 돼도 넌 안돼.
기어코 그것을 해 버리는 상대에게 독이 담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행위를 부추긴 건 나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이제 우린 금지 메시지에 담긴 위험성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결방법도 배웠습니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접근을 해보면 어떨까요. 관계의 통로에도 화단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는 그 대화가 일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합니다. 어제의 다툼이 오늘의 애틋함이 되는가 하면 영영 풀리지 않을 것 같은 갈등도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풀리곤 하죠. 어떤 말이던 한 번으로 끝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주고받습니다. 그 반복의 메시지에 하지 말아야 할 것보다는 '하길 바라는 것'을 담아보면 어떨까요. 어린 자녀의 경우, "밤에는 뛰지 말랬지!" 대신 "하늘이 깜깜해졌으니 살살 걸어줄래."라던가, "물건 던지지 마!" 대신 "물건을 줄 때는 이렇게 손에 놓아주는 거야."라고 고쳐 말할 수 있습니다. 금지할 행동보다 참고할 행동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죠. 연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늦게까지 전우들과 PC방을 지키는 남친에게, 친구들만 만나면 연락이 두절되는 여친에게, "이 웬수 같은 인간아. PC방 좀 가지 마! 친구들 만나지 마!"라고 하기보다는 "적당히 하고 집에 가서 일찍 자. 건강 상하겠어.", "친구들과 놀다가 가끔씩은 핸드폰을 확인해줘. 걱정돼서 그래."가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물론 상대에게 건네는 모든 메시지에는 우리 관계에 대한 존중을 담는 것이 좋습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변화가 그렇듯 나의 작은 시도들이 모여 우리 관계에 큰 자양분을 만들테니까요. 반복되는 장면, 지속되는 대화, 그 많은 순간들에 꽃을 하나씩 심어 보세요. 처음엔 그 효과 미약하겠지만 시간이 흐른 뒤엔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대방도 깨닫게 될 거예요.
내가 우리의 관계를 존중하고 사랑해왔다는 것을.
그 길목을 경고문과 CCTV 대신 화단으로 꾸미고자 했다는 사실을.
왕고래입니다. 심리학을 전공했고 소심합니다. 사람에 대한 글을 씁니다. 어릴 적, 꿈을 적는 공간에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아직 변하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