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
'모든 백성이 즐겨 따랐다'라는 뜻을 가진 백제는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기원전 18년에 한강유역에 세운 고대국가다. 백제 초기의 성이었던 한강유역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도 그들이 섬세하게 쌓아 올린 토성의 축성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자연적으로 생긴 구릉을 이용하여 높은 곳은 그대로 두고 지형이 낮은 곳에 흙으로 빚은 점토를 차곡차곡 쌓아 올리고 성벽의 바깥쪽 비탈진 경사면은 깎아내어 적군이 오르기 힘들게 만들었다.
475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수도였던 한성(서울)이 함락되자 차령산맥과 금강이 흐르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겨 성을 쌓으니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 공산성이다. 천혜의 요새였던 공산성은 문주왕과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에 도읍을 사비(부여)로 옮길 때까지 64년간이나 백제의 왕성이 되었다.
공산성이 다른 성보다도 특히 아름다운 것은 금강이 성 아래로 흐르기 때문이다. 100미터 정도의 야트막한 능선과 계곡을 이용하여 축성된 성 위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게다가 독특하게 산성 안에 왕궁을 가지고 있다.
공북루와 진남루를 가로질러 서울로 오가는 관리들의 주 통로였던 너른 땅은 공산성과 군영이 그 기능을 상실하자 1900년대 100여 년동안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들이 살았으니 성안마을이다. 무열왕릉의 발굴이 시발점이 되어 시작된 백제의 유적 발굴은 이곳이 옛 왕궁유적지(추정 왕궁지)였음을 알아내었다.
삼국사기에 궁 동쪽에 있는 임류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류각의 서쪽에 해당되는 공북루 남쪽 지역에 백제시대의 왕궁이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가을 분위기에 흠뻑 젖어있는 공산성의 매력은 직접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구불구불 이어진 성벽 옆으로 휘영청 늘어진 고목의 오색 이파리뿐만 아니라 바람에 휘날려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성곽길을 걷다 보면 마치 꿈길을 걷는 듯하여 가파른 오름길도 힘들지 않고 기나긴 성곽길도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가을의 공산성, 정말 아름답다.
백제인들에게 강은 진취성을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풍요의 상징이었다.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 어디로든 항해해 나가며 강국으로 발돋움하여 538년에는 협소한 웅진에서 넓은 평야지대와 교통의 요지였던 사비로 천도하며 황금 같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공산성은 조선시대에도 감영을 비롯하여 중군영 등 중요한 시설이 있었다. 특히 쌍수정은 조선시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이곳으로 피난 온 인조가 6일간 머물렀던 곳이다. 인조는 두 그루의 소나무 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고, 난이 평정되자 자신이 기대고 있던 쌍수에 정 3품의 작위를 내리고는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은 쌍수 산성이라고도 불렸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을 건립하니 쌍수정이다.
찬란한 문화예술의 꽃을 피우며 중국과 백제 일본을 이어주는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던 백제의 건축물인 공산성은 인류 가치의 중요한 교류의 증거가 되었기에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등과 더불어 백제역사유적지구로 2015년 7월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소중한 우리의 유산, 공산성 성곽길을 아름다운 이 계절에 걸어본 오늘의 기억이 너무 소중하다.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탄성을 지르며 행복했고 또 뿌듯한 자부심으로 힘이 불끈불끈 솟았던 하루다. 아직 와보지 않았고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꼭 다녀가기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