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이라기보다는 고택의 분위기가 나는 천은사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민족 신앙의 영지였다. 웅장하고 아늑한 산세는 동서남북으로 펼쳐지는데 그중 남쪽에 오도카니 자리 잡은 사찰이 천은사와 화엄사다. 명산에서 만나는 사찰은 종교를 떠나 여행객들에게 쉼과 힐링을 선사해 준다. 화엄사는 그 규모가 엄청난 데다가 다양한 보물을 보유한 대가람인 반면 천은사는 마치 대갓집의 고택처럼 아담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 사찰로 가려면 세속의 마음을 씻고 불보살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피안교가 있고 그 위에 지어진 2층 정자 수홍루가 있다.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은 수홍루를 지나 큰 호수를 이루니 천은 저수지다. 저수지가 있어 천은사가 더 운치가 있다.
천은사는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하여 고려시대까지는 영화를 누렸으나 임진왜란으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숙종 때부터 중창을 거듭하여 지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다.
오전 시간이어서인지 인적 하나 없이 한적하다. 대부분의 사찰은 보제루 아래를 통과해서 중심 건물로 가는데 천은사는 옆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아늑한 산사 마당에는 극락보전과 보제루가 마주하고 오른쪽에는 운고루가 있다. 고풍스러운 멋을 자아내는 회승당은 스님들이 수행하며 거처하는 곳인 듯하다.
오랫동안 지리산을 관통하는 관광 도로를 막고 입장료를 징수하여 말이 많았으나 지금은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니 한 번쯤 들러 고찰의 분위기에 젖어보는 것을 권한다.
문화재 가득한 대가람, 화엄사
"아기 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을 읽는 순간부터 훈훈해진 마음은 눈을 가리고(불견) 입을 가리고(불언) 귀를 막은(불문) 귀여운 불상을 지나며 법구경의 가르침에 심하게 공감해 본다.
성보박물관에는 영산회 괘불탱(국보 제301호)과 임진왜란의 병화로 파편만 남아있는 화엄석경 (보물 제1040호) 등 많은 보물이 전시되어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두루 모든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가 있는데 다른 사찰과 달리 1층의 기둥 높이를 낮게 만들어 옆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이는 중심 영역의 경관을 강조하기 위한 배려라 한다. 중심 마당에 들어서면 동서 쌍탑 정면의 대웅전과 각황전의 장엄한 모습에 놀라고 영산전 나한전등 전각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는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보제루 앞마당 아래에는 승방과 강당 등의 수행 공간이 있고 위에는 대웅전과 각황전 등의 예불 공간이 있다.
각황전 앞에는 네 마리의 사자와 합장을 한 채 머리로 탑을 받이고 서있는 승상이 있는 사사자 삼층석탑과 높이가 6 미터가 넘는 거대한 석등이 있는데 이 또한 중요한 유물이다.
대웅전보다도 그 규모가 큰 각황전은 장륙전이 있던 자리에 숙종 때 중건된 전각이다. 봄이면 붉다 못해 검게 보여 흑 매화라 불리는 매화나무는 계파 선사가 각황전을 중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심었다 한다.
지리산에 올라 체력을 다졌다면 분위기가 전혀 다른 두 사찰도 함께 방문하여 마음까지 힐링을 시켜보자. 국보와 보물도 관람하고 고찰의 건축미에도 빠져 보고 한적한 분위기에 비종교인이라도 좋은 말씀 되새기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