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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Mar 24. 2020

15년 만의 집 정리에서 찾아낸 소중한 추억

작은 딸 초등학교 1학년 때 이사 온 현재의 아파트가 살기에 불편한 것은 아니다. 한강이 아니라도 앞에는 안양천이 흐르고 널찍널찍한 앞마당에 좁지 않은 아파트는 쾌적하기 이를 데 없으나  여행을 다니다 보니 갑자기 지방에 내려가 살고 싶어 졌다.


다행히도 남편의 직업이 건설업이기에 지방 살이가 꿈만은 아니었다.  마침 다니던 회사에서 강릉 현장을 기획하고 있었기에 내 마음은 이미 강릉의 푸른 바다로 날아가 있었다.  아~ 그런데 그놈의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꿈을 앗아가 버렸다. 신축 아파트 계획은 무기한 연장되어 버리고 세상에나 바로 한강 건너 덕인 지구로 발령이 난 것이다.  용인 수지도 괜찮고 강원도도 괜찮은데 하필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덕인 지구라니...


우리는 앞으로 아파트 공사가 끝나는 2년 동안은 이 집에서 더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돌아본 우리 집은 벽지는 우중충했고 형광등은 그 수명이 다했는지 깜빡깜빡. 샤워기는 냉온수 조절이 제대로 되질 않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우중충한 벽지는 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시장통 칠 집에 가서 문의를 해 보니 이백칠십만 원이나 달란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셀프 페인팅!


친환경 페인트와 붓과 마스킹 테이프 등을 사 왔다. 열 박스 가까이 짐을 빼간 큰 딸의 방이기에 쉽게 생각했으나 차곡차곡 쌓아놓은 책과 화장품 등이 엄청나다. 한참이나 짐을 빼내고 청소하고 마스킹 테이프 붙이고 그리고 시작된 붓칠. 얼룩덜룩한 벽은 세 번이나 덧칠을 하고 나서야 말끔해졌다. 그날 큰 딸과 우리 부부는 완전 녹다운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주는 작은 딸의 방. 이른 아침부터 호기 있게 시작하던 남편은 도중에 허리를 삐끗하고는 침대에 눕고 말았다. 완전 저질 체력인 나 밖에 없다. 한쪽 벽 칠하다가 눕고 천장 칠하다가 다시 눕고. 엉거주춤 허리를 잡고 나온 남편은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한다.

"모레 출근할 사람은 그냥 빠져. 내가 어떻게 해 볼게" 쉽게만 보였던 페인팅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그나마 작은 딸 방이 작았기에 망정이지. 어찌어찌 겨우 칠은 끝났고 건넌방에 페인트가 아직 남아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두 손을 들었다.


새 단장한 큰 딸 방은 그동안 우리가 그리도 꿈꿔왔던 서재로 변신했다. 저 구석에 처박혔던 앨범이 한쪽 벽면으로 빼곡하게 채워지고 그동안 바빠 정리도 못했던 작은 딸의 사진들이 10년 만에 앨범 안으로 꽂혔다. 큰 딸은 동그랗고 작은 딸은 길쭉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누가 큰 딸이고 누가 작은 딸인지 도대체 분간이 가질 않는다.  세대가 변하여 다들 카메라가 아닌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지만  나는 구새대여서인지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추억을 떠올리는 그 순간이 너무 좋다.


촌스런 결혼사진부터 아이들이 커가며 웃음을 주었던 많은 순간들, 탤런트 김주승과 똑 닮았던 남편의 샤프한 모습, 원래 뚱뚱했다고 생각했던 시어머니의 날씬했던 모습 또 나의 앳된 모습도 그 앨범 안에 소중하게 남아 있었다. 이미 잊혔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시간들.


딸들이 무작정 버린 쓰레기 더미에도 아름다운 추억이 묻어 있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를 위해 감긴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안무와 함께 공연을 해주던 딸의  멜로디온, 짠지 엄마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야 사주기 시작한 홀더 폰 슬라이드폰에 이어 최근 스마트폰까지 여러 개의 중고폰들. 할아버지가 억지로 외우게 했던 천자문 책. 빵가게를 그만두며 가져왔던 스티커와 각종 비닐 그리고 포장재료들. 딱지도 떨어지지 않은 채 쓰레기봉투에 담겨 있는 인형 뽑기의 인형들. 작은딸의 서랍장에서 나온 나의 카디건.


딸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에서 다시 주워온 추억의 물건들은 또 얼마 후에 다시 버려질 게다. 법정스님이 늘 주장하시던 '무소유' 필요 없는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삶이란 나 같은 욕심 많은 아줌마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싱크대에서 소중하게 썩고(?) 있는 주발세트, 수저받침 세트, 포크 세트... 아이들 결혼하면 쓰라고 만들어둔 아기이불부터 테이블보 앞치마 등까지 많기도 하다. 나중에 가져가기나 할는지!  


집안 살림을 홀딱 뒤집고 났더니 우리 집이 조금은 깔끔해졌다.  2주간이나 이어진 집 정리는 집을 정돈한 것이 아니라 잊고 살았던 소중한 추억을 되살리는 시간이었다.  지나가다 꼬마들을 만나기라도 하면 걸음을 멈추었고, 윌 벤져스를 보기 위해 손꼽아 주말을 기다려 왔지만 앞으로 얼마간은 우리 예쁜 딸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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