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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Nov 23. 2020

으악새 슬피 우는 명성산으로

바람 한 번 불어 제치면 우수수 쏟아지던 단풍잎이 겨울을 재촉하는 비로 엉망이 되어 버렸다. 햇볕을 받으며 매달려 있을 때도 예쁘지만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바스락 거리며 밟아 보고 싶었는데...


가을이면 단풍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이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억새와 갈대다. 민둥산의 억새는 멋지다 하나 단풍을 볼 수가 없고, 황매산의 억새는 서울에서 가기에는 너무 멀다. 그에 비해 포천에 있어 접근성이 용이한 명성산의 억새밭은 그 규모나 크기가 순천만의 갈대밭이나 하늘공원의 억새밭만큼은 아니지만 독특하게 산 정상에 있는 데다 입구의 단풍과 산정호수까지 즐길 수 있어 좋다.


순천만 갈대 밭과 하늘공원의 억새 밭


주말이라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새벽 5시에 출발한 우리는 7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늦가을 아침, 게다가 날씨마저 흐린 덕분에 화려한 단풍나무는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어쩌다 만난 사람이라고는 몇 쌍의 부부뿐이다.




명성산의 억새를 보러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다. 경사가 완만하다지만 계곡과 등산로의 차이는 물이 조금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온통 바위로 뒤덮여 있는 너덜길이다. 떨어진 낙엽들의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나 보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한참 전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부부는 노사연의 '바램'을 자동 재생해 놓았는지 벌써 몇 번째 돌아가고 있다. 가끔 들리는 까마귀 소리 외에는 계곡의 물소리조차 희미한 산속에 울려 퍼지는 노래에 아니 그 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울컥하고 만다. 특히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구절에서는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게 된다.


오늘 우리가 보러 가는 억새도 푸르렀을 때보다 황금빛으로 빛날 때가 더 아름다운걸!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 철원에 후고구려를 세워 스스로 왕까지 되었으나 점차 민심을 잃고 왕건에게 왕위를 빼앗기고는 이곳 명성산으로 피신했다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궁예. 그 설움으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으니 이 산은 울음산(명성산)으로, 그 울음이 폭포가 되어 내린 곳이 등룡폭포다.




두 개의 폭포로 이어진 위풍당당한 등룡 폭포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오래전 종영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탤런트 김영철의 강렬한 궁예 모습이 떠오른다. 물이 많은 여름철이나 안개가 피어오르면 더욱 멋진 모습으로 보일 것 같다.


잔뜩 찌푸렸던 날씨는 이따금씩 반짝이는 해를 보여 주었는데 그때  마침 시작된 억새밭은 스산했던 가을 산의 분위기를 확 바꿔 놓았다.




드디어 억새밭이다. 계단으로 이어진 길에 우뚝 선 순간 보호수처럼 산 등성이에 심어진 몇 그루의 나무를 제외하고는 온통 억새다. 와우! 하늘거리는 억새 사이를 헤집고 다니고 싶었지만  중앙을 관통하는 억새 바람길과 군락지 주변을 도는 억새 풍경길로만 감상할 수 있다. 산봉우리 사이를 빼곡하게 채운 황금물결은 팔각정까지 이어진다.






억새 바람길은 나무 데크의 계단길이고 풍경길은 야자매트가 깔린 흙길이다.


풍경길에서 바라본 전망대


벼르고 벼르다 오른 명성산. 억새밭을 헤매고 다닌 지 어느새 한 시간이 넘었건만 하산길이 못내 아쉽다. 오후가 되면서부터는 날씨도 활짝 개이고 조용했던 산은 오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단체 관광객들로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중간쯤 내려왔을까?

"어머 개구리다!"

"이 녀석 겨울잠은 안 자고 왜 나왔어?" 하고는 한 남자가 냅다 계곡으로 던져버린다.

어안이 벙벙해하는 우리를 보며 "안 죽어요. 여기 있으면 도리어 밟혀 죽지"

억새밭을 다녀온 기쁜 마음은 순간 걱정으로 바뀌었다. 과연 그 녀석은 다치지 않았고 다가오는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으려나?




산정호수는 갈비 먹고 싶을 때 드라이브 겸 찾던 곳이다. 산책로가 지난여름처럼 청량감이 있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산봉우리들이 데칼코마니가 되는 수변 풍경이 산행으로 피곤해진 몸과 마음을 풀어주었다. 이 산중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이렇게 큰 호수를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포천 명성산으로의 여행, 단풍도 보고 누런 갈대밭도 실컷봤으니 이제는 가는 가을을 놓아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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