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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Oct 24. 2021

무왕의 기개와 용감성이 서려있는 익산 백제 문화지

왕궁리 유적지, 미륵사지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통정하여 두고

맛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서동이라 불리던 백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를 사모하여 신라 땅에 가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향가 서동요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정치적으로 팽팽하게 대립되어 있던 시기였음에도  호방한 사내 무왕은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도 남달랐다.



적국 공주 선화와 결혼한 무왕은 마한계 세력까지 끌어들이기 위하여 익산 천도를 추진하였다. 이는 난국 타개의 묘수이자 패전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을 단합시키고 국가의 부흥을 꽤 하고자 하는 무왕의 결단력에서 온 것이다.


왕궁리 유적지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야트막한 언덕이 1500 년 전 무왕이 백제를  부흥시키며 왕궁을 짓고 살았던 삼국시대의 왕궁터인 왕궁리 유적지다.  전쟁이 많았던 고대 삼국시대에 평야지대에 왕궁을 지었다는 것은 무왕이 얼마나 용감하고 걸출한 기상을 가졌는지를 말해준다.



직사각형에 가까운 궁성은 남북 492 미터 동서 234미터(2:1)의 땅에 폭 3미터 내외의 석축 성벽을 두르고 경사면에 따라 4단의 석축을 쌓았다.  대형건물을 포함하여 부속 건물에 정원까지 조성하고 궁궐 문도 여섯 개나 있었다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왕도 왕궁도 백제라는 나라도 사라지고 튼튼한 화강암으로 만든 5층 석탑만이 오늘도 의연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양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지

무왕이 왕비와 용화산에 있는 사자사로 지명 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 삼존이 출현하였다. 왕비가 간청을 하여 절을 지으니 미륵사다. 동양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 창건으로 무왕은 새로운 왕국의 비전을 공표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제인들에게 미륵 불국토를 실현하게 함으로써 구원의 징표를 주려한 것이다. 기존의 사찰 건축이 1 탑 1 금당 형식이라면 용화수 아래에서 3번의 설법으로 세상을 구제한다는 미륵사상을 보여주기 위하여 미륵사는 3 탑 3 금당으로 지었다.


어느새 서리가 내려앉은 미륵사지는 더 넓고 더 휑해 보인다.


미륵사지 석탑 앞에는 동서 방향으로 두 기의 당간지주(보물 236호)가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미륵사가 얼마나 큰 사찰이었나를 가늠하게 한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놓는 돌기둥이다.


당간지주 옆에는 이를 둘러싼 회랑이 있다.

입구의 연못만이 오랜 세월 속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다. 제법 차가운 날씨에도 연못 가운데 자리 잡은 세 아가씨는 우리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저렇게 앉아 있다. 미륵사지의 기운을 받기 위하여? 아니면 백제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일까?


연못 주위의 나무들이 야물게 흙을 잡고 있어 비가 많이 와도 넘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커다란 직사각형에 가까운 절터에는 짝을 맞추지 못한 돌덩이들만 세워져 있다.


미륵사지 석탑

탑이란 본래 인도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든 건축물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목탑이 세워졌다. 미륵사의 3 탑 중 목탑은 불에 타서 없어져 백제문화단지의 능사에 재현해 놓았고 두 석탑 만 이 넓은 미륵사지에 남아 있다.  익산지역에서 나는 풍부하고 질 좋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은 목탑의 건축방식에 따라 세워졌다. 목탑이 석탑으로 변해가는 최초의 사례로 건축사적으로 그 의미가 크다고 한다.


목탑을 가운데 두고 동원과 서원에 석탑이 있다. 


국보 11호인 서탑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본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 6층까지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살짝 말아 올라간 것이 섬세하고 은은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석탑의 해체 작업 중 탑의 맨 밑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공(사리를 담은 사리함을 봉안하기 위해 판 구멍)에서 나온 유물(금동제 외호와 금제 내호 은으로 만든 관식과 청동합 등)들은 국립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석가모니 진신사리는  그 자체가 영원불멸의 상징이었기에 여러 보물들과 함께 봉안한 것이다.



1992년에 복원된 동탑에는 특이하게 네 모서리마다 풍탁이 꽃등처럼 걸려 있다. 동쪽 석탑터에서 출토된 풍탁 한 점을 근거로 만든 것이다. 서탑처럼 섬세한 면은 없지만 단조로움에 풍탁이 달려있어 또 다른 매력을 풍기고 있다.


넓은 터와 석탑만 남아 있는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는 공주 부여의 다른 유적과 함께 백제의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된 고고학적 유적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백제역사유적지구"라는 명칭으로 2015년 7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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