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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Oct 20. 2021

영원에 이르는 궁궐

백제역사유적지구,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 부여 능산리 고분군

영원에 이르는 궁궐 

떠나는 이의 업적과 보내는 이의 정성으로 완성된 고분 안에는 

한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성시대 고구려에게 쫓겨 내려온 백제는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공주(당시 웅진)에 자리를 잡았다. 백제는 남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있고 서해로 나갈 수 있는 금강까지 있어 일찌감치 중국과 일본과도 교역을 시작하며 안정적으로 발전하여 사비시대에는 지금의 부여 익산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그 시대의 왕과 왕비는 죽어서는 웅진시대에는 공주 송산리에, 사비시대에는 부여 능산리에 안치되어 영원의 세계로 갔다. 


무령왕릉과 왕릉원(송산리 고분군)

금강 남쪽 기슭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작은 구릉의 8부 능선에 백제 웅진시대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있다. 원래 17기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1~6호분과 무령왕릉까지 총 7기가 복원되어 있다. 고분군에 들어서면서부터 널찍하고 푸르름이 가득한 것이 도심 한가운데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다른 왕릉과 분위기는 같으나 무령왕릉을 제외한 나머지 무덤은 거의 도굴되어 텅 비어 있는 데다 어느 왕의 묘소인지조차 알 수가 없어 1호, 2호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무덤마다 문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도심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있는 무덤을 자세히 보려면 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돌면 전체적으로 무덤을 관찰할 수 있다.


고분에 대하여 상세하게 전시하고 있는 웅진백제역사관

고분군 바로 앞에 있는 웅진 백제역사관에 가면 백제의 역사와 문화 고분 등을 전시와 영상을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송산리 고분 등 백제역사지구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까지의 여정과 의미까지 알 수 있다.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진묘수(우)의 모형이 왕릉 앞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백제시대 무덤 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된 것이 무령왕릉이다.  무덤을 지키고 죽은 자를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진묘수,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은 물론 성품과 업적 등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는 지석 외에도 4,600여 점의 유물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1~6호분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가루베 지온에 의해 조사와 도굴이 무단으로 이뤄졌다. 7호분인 무령왕릉은 1971년 6호분의 배수시설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 다행스럽게도 1,500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백제의 화려하고 세련된 미의식과 창의성 등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백제 왕릉은 매장부를 비우고 돌로 쌓아 무덤방 앞에 입구 및 널길(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을 설치한 굴식 돌방무덤(1호~5호)과 벽돌로 직사각형의 무덤방을 만든 벽돌무덤(6호와 무령왕릉)이 있다. 


굴식 돌방무덤인 5호고분(좌)과 벽돌무덤인 6호고분의 모형
벽에 그려진 사신도


무덤 발굴 50주년과 갱위 강국을 선포한 지 1,500 년을 맞이한 지난 9월,  공산성 앞 광장에는 무령왕 동상이 세워지고 '송산리 고분군'이라 부르던 고분을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난 9월 공산성 앞에 세워진 무령왕릉 동상


백제왕릉원(능산리 고분군)

능산리 고분은 부여의 사비도성 바로 밖에 동서로 이어지는 해발 121 미터의 능산 산기슭에 있다. 좌우로 야트막한 구릉들이 감싸고 앞으로 개울이 흐른다. 마치 큰 눈썰매장을 연상하게 하는 넓디넓은 잔디밭이 펼쳐진 꼭대기에 무덤이 3기씩 앞 뒤 2열을 이루고 북쪽으로 7호분 1기가 더 있다. 





7기의 무덤과 떨어져 2기의 봉분이 있는 곳은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의 가묘다. 의자왕은 중국 뤄양 북망산 어딘가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미 도굴되어 어느 곳이 의자왕의 무덤인지 알 길이 없어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의자왕과 아들 부여융의 가묘가 있는 의자왕단


능산리 벽화 고분의 모형


부여 능산리 사지와 금동대향로

성왕은 부여로 도읍을 옮긴 왕이다. 그러나 관산성 전투에서 진두지휘를 하던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투지로 갔다가 매복한 신라군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신라군은 베어진 목을 가져가서는 경주 땅에 묻고  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했다. 위덕왕 14년,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능산리에 절을 지었으나  백제가 멸망하면서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고분 옆에는 능산리 사지가 있다.

백제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는 1993년 12월 12일 능산리 고분군 주차장 공사를 하다가 진흙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높이가 61.8센티미터 무게가 11.8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대형 향로에는 5인의 악사와 17인의 인물상, 봉황 용 등 상상의 날짐승과 호랑이 사슴 등의 동물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금동 대향로가 발견될 때의 모습을 절터에 그대로 재현해 놓았고 원형은 국립 부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백제의 수도인 부여를 수비하기 위하여 쌓은 나성이 절터 옆을 지난다. 부소산성에서 시작하여 수도의 북쪽과 동쪽을 보호하고 있다. 이는 수도 방어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나성도 고분군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백제 역사유적지를 돌다 보면 대부분 터만 남아있다. 이는 나당연합군과 싸울 때 소정방이 7일 동안이나 불태웠기 때문이란다. 불태워지고 도굴당하고. 그나마 발굴된 몇 점만으로 그 당시 백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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