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미의 세상 Oct 23. 2021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성

정림사지 5층 석탑

공산성은 고구려나 신라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였지만 점차 발전해 가는 백제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538 년 성왕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겨 궁을 지었던 자리가 부소산성이다. 우리나라의 젖줄인 4대 강의 하나인 금강(부여에 이르러 백마강으로 불린다)이 반달처럼 휘감아 흐르는 넓은 평야지대에서 사비시대를 연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기 전까지 123년 동안 이곳에서 찬란한 전성기를 누린다.



백제때 언어로 소나무를 뜻하는 부소. 부여는 가로수도 소나무를 심었다. 그 부소산 아래 있던 사비궁 역시 궁터만 남아 있다. 왕궁의 후원으로 전쟁 시에는 방어 거점 역할도 했다는  부소산성은 부소산 능선과 계곡을 가로지르며 자리 잡고 있다. 푸르고 우아한 나무들이 가득하다. 나무들이 내뿜는 상쾌한 내음과 나뭇가지 사이로 영롱하게 반짝이는 아침햇살이 꽤나 산뜻하다. 곧 빨갛게 물들 모습을 떠올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면 백제 왕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지난 가을의 부소산성

서쪽 백마강을 끼고 슬픈 전설을 간직한 낙화암.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여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는 적군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백마강 아래로 스스로 몸을 던진 곳이다. 꽃 같은 여인들이 떨어졌다 하여 그 바위를 낙화암이라 하고  송시열은 '낙화암'이라는 글씨를 붉게 새겼다. 주위의 절벽 색깔이 유난히 붉다. 당시 백제 여인들이 흘린 피로 바위가 물들었기 때문이란다. 부소산성을 걷는 내내 그 풍경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던 것은 그때의 그 여인네들의 애달픈 마음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낙화암과 백화정


낙화암 아래에는 약수로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삼천궁녀를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절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은 그저 유유히 흐르며 맑고 쾌청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잔 마시면 삼년 젊어진다는 약수는 백제시대 임금들이 즐겨 마셨다 한다.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부소산성길은 부소산 구문에서 반월루 사자루 낙화암 고란사까지 돌고 오는 한 시간 코스부터 군창터와 영일루 부소 산문까지 돌아오는 2시간 코스가 있으니 체력에 맞게 돌아볼 수 있다. 고란사에서 유람선을 타면 선상에서 부소산과 낙화암을 관광할 수 있다.


정림사지 5층 석탑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기존 목조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석재를 이용하여 만든 석탑으로 좁고 낮은 단층 기단과 각층 우주에 보이는 민흘림, 살짝 들린 옥개석 기단부 등 목탑적인 기법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 양식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한다.


그러나  이 탑에는 상처가 있으니 당나라 소정방이 탑의 1층 탑신에 승전 기공 문인 "대당 평 백제 국비명"을 새겨 놓았다. 이는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쳐서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왕과 신하등을 포로로 잡아간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정림사지는 비록 터만 남아있지만 독특함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기와 조각을 쌓아 만든 기단(와적기단)이다. 옆으로 길게 쌓기도 하고 'ㅅ'자 모양으로 연결해 쌓은 와적기단은 통일신라시대에도 볼 수 있고 일본까지 전파되어 나라시대 건물에서도 다수 발굴되었다.



정림사지 5층 석탑 남북 측 선상에 있는 석불좌상은 극심한 파괴로 형체만 남아 있던 것에 머리와 보관을 만들어 얹었다. 세부적인 것을 알아볼 수 없으나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지권인'은 불법으로 모든 것을 감싼다는 것을 상징한단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제의 역사와 문화가 궁금하신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