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평균 집값이 10억! 1억이라는 돈은 연봉 3천만 원을 받는 월급쟁이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3 년 동안 저축해야만 모을 수 있는 돈이다. 그러니 집 한 채 장만하려면 적어도 30 년이 넘게 걸린다는 말이다. 취업도 어렵고 내 집 마련도 쉽지 않은 요즘 우리 아이들은 결혼도 미루고 아이 낳는 것도 꺼리고 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 때도 내 집 마련은 쉽지는 않았다. 요즘에는 주인과 같은 부엌과 욕실을 쓰는 연립주택 단칸방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하긴 우리는 둘 다 직장 생활을 했기에 그 불편함을 덜 느끼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눈치와 설움이란 없을 수가 없다. 헤어 드라이기 하나를 쓸 때도 주인 할머니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으니 세탁기를 산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고 아침 댓바람부터 손빨래를 하고 출근을 해야 했다. 결혼 전에는 양말 한 켤레 빨아본 적이 없던 내가 말이다.
샤워를 끝내고 축축한 몸에 모든 옷 챙겨 입고 나오는 것이 얼마나 불편했던지 우리가 독채 전세로 이사하고부터는 남편은 샤워만 하면 나 보란 듯이 팬티 바람으로 온 집안을 돌아다니곤 했다. 그렇게 독채 전세로 이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저축을 많이 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 내가 은행원이었기 때문에 직원 대출을 저리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집 마련을 해서 이사했던 날보다 독채 전셋집으로 이사했던 날이 더 행복했던 것 같다.
35년 전 내 월급이 30만 원 정도였으니 전세금 1,800만 원이란 돈은 우리에게는 무지 큰돈이었다. 그 돈을 대출받아 대림동 22평 아파트로 옮겼을 때 그 집 값은 2,200만 원이었다. 88 올림픽 후 그렇게 집값이 오를 줄 알았다면 사채라도 빌려서 그 집을 샀어야 했는데 간발의 차이로 우리는 오르는 집 값을 그저 보고 있어야만 했다.
우리 부부가 5 년을 열심히 저축하고도 자금이 모자라 다시 은행에 5,000만 원 대출을 받아 겨우 목동에 27평 아파트를 장만하였다. 그러니 그때도 내 집 마련하는데 거의 10 년이 걸린 셈이다. 그런데 한 5 년 정도 살다 보니 아이가 커서 아이방을 마련해 주고 싶어 알아보니 방 한 칸 넓히는데 1억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저축해도 오르는 집값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목동 주변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또다시 방 한 칸을 넓히기 위해 퇴직금 중간 정산까지 받아야 했다. 그저 평수 넓히는데 급급해 보일지는 몰라도 우리의 힘으로 방 한 칸 한 칸 넓혀가는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아들이 둘인 우리 시어머니는 기름 한 병을 주시면서도 "너희 둘 똑같이 나눠주는 거야"하시더니 막판에는 모든 재산을 큰 집에 다 물려주셨다.
"어머니 우리가 이만큼 집 장만하고 사는 것은 전부 제가 한 거예요"
"그래서 유세하냐?"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시어머니께 조목조목 따지 지를 못했고 그 서운한 마음은 지금까지도 가시지를 않는다. 정말 시댁에서 우리에게 보탠 것이라고는 결혼할 때 전세금 300여만 원과 중간에 1,000만 원 주신 게 다다. 하긴 아버님이 연금을 받으시니 지금까지 생활비 한 푼을 드리지 않아도 되니 도리어 감사해야 하나? 그래도 20여 년간의 직장생활로 집을 옮길 때마다 대출을 받아 이만큼 살게 한 며느리가 이 정도 유세는 해도 되지 않나? 아마 큰 집 식구들은 방 한 칸 한 칸 넓혀 갈 때의 즐거움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 후 빵집을 하기 위하여 목동아파트로 다시 들어오려 했을 때 나는 퇴직금에서 3억이라는 큰돈을 또다시 집에 보태야 했다. 정말 재테크에 있어서는 얼마나 멍청했는지 모른다. 대림동 아파트로 옮길 때 좀 더 무리를 해서 집을 샀더라면 아니 방 한 칸 늘리는데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목동 아파트 27평에 머물다가 천천히 옮겼더라면 좀 더 쉽게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얼마 전 동해에 사는 남편 친구와 부부동반 모임이 있었다. 그 집은 대학 졸업 후 일찌감치 동해에서 사업을 시작했고 우리는 서울에서 맞벌이를 하였다. 우리가 그깟(?) 집 마련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그들은 집에 그렇게 돈을 쓸 필요가 없었다. 사업체를 가진 그는 그곳의 유지가 되어 라이온스 클럽에도 들어가고 부부 골프는 물론이고 수시로 크루즈 여행도 다니며 여유롭게 살아왔단다. 물론 집값을 돈으로 계산하면 서울의 집값이 더 많이 나갈지는 몰라도 삶의 질에 있어서는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그 후 나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충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작은 딸에게 늘 말한다.
"그곳에서 좋은 남자 만나서 그곳에서 살아. 엄마처럼 서울에 내 집 마련하느라 평생을 보내지 말고."
그러나 오직 집과 회사만을 오가며 살고 있는 딸이 에미의 말이 들릴 리가 없다. 그녀는 입사한 지 2년이 조금 넘은 지금 벌써 이직을 꿈꾸고 있다. 하긴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충주에서 살자니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나기도 어렵고 문화생활도 뒤떨어진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곳 생활이 익숙해지면 복잡한 서울살이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알 게 될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