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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Feb 28. 2022

워킹맘의 좌충우돌 육아

30대의 나는  누구보다 바쁘게 살았다. 이른 아침부터 스포츠 센터에 가서 운동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식사 시간을 줄여 직장 근처 어학 학원에서 외국어 공부를 하고 퇴근해서는 육아와 살림살이까지 해냈다. 그러니 저녁 9시만 되면 거의 실신상태가 되어 소중한 가족과 따뜻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나보다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산다는 게 중요하지 않은데 말이다.


내가 일을 계속함으로써 가장 힘들었던 사람은 바로 우리 친정 엄마다. 남동생이 군대에 간 뒤홀로 사시는 엄마를 우격다짐으로 우리 집에 모셔 온 것은 절대 효심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 딸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때 엄마 나이가 바로 지금의 내 나이. 아이들 다 키워놓고 이제야 친구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엄마의 마음은 생각하지 않았. 친정 엄마가 오신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아이를 놀이방으로 나르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 안심하고  일에 전념  있었다.


그렇지만 방금 마신 우유병 소독은 왜 또 하냐며 물로 휘휘 닦아 먹이는 등 육아에 대한 의견 차이로 우리 모녀는 거의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 밤중에 우유를 세 병이나 먹어 치우는 딸은 엄마가 매 끼니마다 고기반찬을 해 주는 바람에 키도 크고  점점 뚱땡이가 되어갔다. 하긴 덕분에 학교 체육대회에 가면 많은 아이들 속에서 남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큰 우리 딸을 찾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그런데 그것이 조숙증이었나 보다. 빨리 키가 컸던 딸은 초등학교 5학년 키에서 정지하고는 지금도 그 키를 유지하고 있다.



오줌을 싸는 것도 유전일까?  아빠가 늦게까지 오줌을 쌌다더니 첫째도 둘째도 늦게까지 오줌을 싸는 바람에 황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친정엄마가 힘들어하실까 봐 네 살 때부터 미술 학원에 가야 했던 큰 딸은 유치원 실습복을 입고 돌아오기 일쑤였고 작은 딸은 다 크도록  침대에 지도를 몇 번이그렸는지 모른다.


큰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날 나는 우리 딸이 제일 똑똑한 줄 알았다.

 "우리 애 가요. 한글도 다 떼고 피아노와 영어와 웅변까지 잘하는데 수업 시간에 딴전 피우지 않을까요?"

그때는 정말 자랑질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걱정에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1학년 담임 선생님은 한껏 비웃는 얼굴로 "그래요?" 하는 것이다. 아뿔싸 다른 아이들도 다 그 정도는 마스터하고 왔던 것이다.


또 하나,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가 있다. '정육면체' 나는 창피하게도 그때 정육면체가 무엇인지 잘 몰랐다. '정육면체라면 정육각형이 붙어있는 상자?'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큰 딸이 갑자기 오늘 학교 준비물이 정육면체를 가져오는 것이란다.

"그게 뭐지? 알았어! 일단 문방구에 가보자"
등교 시간의 문방구는 말도 못 하게 붐볐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들은 대답이라고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출근시간은 다가오고 딸은 거의 울상이 되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너 준비물은 저녁에 이야기해야지. 엄마 출근해야 하는 지금 이야기하면 어떡해! 오늘은 그냥 가!"
딸은 포기하기는커녕 " 엄마, 정육면체~"하며 따라오는 것이다. 그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울며 따라오는 딸의 등짝을 냅다 내리치며,

"그냥 가라고! 엄마 늦었단 말이야!"
나의 목소리는 우레와 같았고 순간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는 무식하고 한심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우는 딸을 내버려 둔 채 미친 듯이 지하철역으로 뛰었다. 다행히 직장은 늦지 않았으나 무거운 마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에 아침에 있었던 일을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도대체 선생들 웃겨. 집에 어떻게 정육면체가 있니? 그런 것은 단체 구입해야 되는 거 아니니?"
"아니 아무 상자나 보내지. 슈퍼에서 과자 상자 중 찾아보면 되지 않나?"
"과자 상자가 그런 모양이 있어?"
그때까지도 나의 머릿속에는 그저 정육각형의 도형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냥 무식이 통통! 나중에서야 설명을
듣고 난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모든 일 제쳐두고 칼퇴를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을 한 보따리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띵똥 소리와 함께

 "엄마" 하며 달려와 품에 안기는 딸.

 "아침에 준비물 때문에 혼나지 않았어?"

 "응 복도에서 손들고 서있었어"

초등학교 1학년인데 좀 봐줄 것이지...


큰애는 잔병치레도 많았다. 툭하면 병원에 가야 했으나 내가 직장에 묶여있는 바람에 매번 애꿎은 큰언니가 불려 왔다. 한 번은 장염이 낫지 않는 바람에 몇 달 동안 이 병원 저 병원  순례만 하고 있었다. 그때 미신에 빠져있던 언니는 무당(?)을 데려와서  무엇인가를 하고 갔단다. 그날로 거짓말처럼 우리 딸은 비록 기운이 없기는 했으나 원기를 회복하였다. 도대체 이게 뭔 일이야?


첫 아이를 키울 때는 힘들기는 했어도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어 아이 키우는 기쁨을 제대로 누렸다. 우리 가족은  아이를 핑계로 주말이면 놀이 공원에도 가고, 직장 야유회에도 아줌마 티  팍팍 내며 딸까지 데려가고 만화 영화를 보러 가는 등 그때 우리 가족의 중심은  오직 우리 아이였다.



그러나 둘째를 낳았을 때는  직장에서 책임자로 승진했기 때문에 온 신경을 일에 집중하느라 아이들이나 집안일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힘들어하시는 엄마에게도 더 이상 폐를 끼칠 수가 없던 나는 둘째를 아침마다 건너편 아파트의 담벼락 너머로 갓난 둘째를 넘겨주고 받으며 키웠다. 처음 그 집 부부는 둘 다 우리 애를 어찌나 귀여워해 주시던지 나는 안심하고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를 데리러 갔더니 다른 집으로 오라는 것이다. 집에서는 홈파티가 열리고 있었고  우리 애는 현관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고 어떤 날은 그분이 테니스를 하고  있는데 우리 애는 흙바닥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점점 불만이 커지던 어느 날  딸을 데리러 갔을 때 우리 딸을 그 집 남자가 목욕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아이 성추행 문제가 한참 TV에서 보도되던 때였다. 나는 질겁을 하고는 그날로 우리 아파트 1층에 있는 놀이방으로 딸을 옮겨 왔다.  


두 집을 오가며 크던 육아 환경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우리 애는 기계치라나 뭐라나 하는 증상이 나타났다. 시계추 소리 같은 작은 기계 소리에도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며 우는  것이다. 그런 증상은 몇 달이나 이어졌고 우리 가족은 한참 동안이나 애를 먹어야 했다.  


늦도록 말을 못 하는 둘째 때문에  혹시 벙어리는 아닐까 하고 조바심이 일었다. 그러던 녀석이 어느 날 말이 트이자 어떻게나 수다를 떨어대던지. 그러나 A에서 시작된 말은 Z로 끝나기 일쑤고, 노래 하나 끝까지 외우 지를 못했다. 첫째와는 너무나 다른 딸이 지금처럼 또박또박 말을 하게 된 것은 논술 학원을 다니고부터다.


직장을 그만두고 또다시 빵집을 열게 된 나는 전보다 더 시간이 없어졌다. 아빠도 엄마도 언니도 밤늦게야  집에 돌아오기에 초등학생이었던 딸은 치매 걸린 할머니와 함께 집에 있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아지 한 마리를 사 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나는 쾌히 승낙을 고 우리 집에 온 첫 번째 강아지는 우리 딸의  절친이 되어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모든 것을 다 해준 첫째와 달리 둘째를 키울 때는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저 학원과 유치원에 보냈을 뿐이다. 큰딸을 이런저런 학원에 보내도 별 효과가 없었기에  둘째는 그렇게 시간을 빽빽하게 짜 놓고 학원에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ABC'도 모르는 아이가 우리 딸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급히 학원에 보내려 했으나 그러려면 유치원 아이들과 같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캐나다 조기 유학이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초등학생 조기 유학이 한참 유행했다.

 

마침 같이 은행을 그만둔 동료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기에 그 사람에게 우리 아이를 부탁하였다. 캐나다 가정에 기초 영어도 안 된 딸을 보낸 것이다. 친구들도 유학을 떠나는 아이들이 많았기에  작은 애는 얼떨결에 유학길에 나섰으나 처음 몇 달은 전화를 해도 말도  안 하고 울기만 하는 것이다. 그때만 해도 후회 막급이었다. 그들은 대화도 안 되는 어린아이를 아래층에 혼자 자게 하고 자기들은 2층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비가  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무서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단다. 어찌어찌 어려운 시기가 지나자 신기하게도 말이 트이기 시작했고 수업 후에도 축구 등 많은 활동을 하며 외국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활달한 성격으로 변했다. 10개월쯤 지났을 때는 오히려 한국에 오지 않겠다 하여 우리 가족은 캐나다 여행을 핑계 삼아 직접 가서는 딸을 데려 왔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해서 배워 온 영어 실력으로 수능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칠 수 없었던 자신감 넘치는 성격과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게 되었고  빵과 버터를 많이 먹어서인지 신체적으로 훌쩍 커서 숙녀가 되어 돌아왔다. 그 영어 실력은 대학에서 토익시험을 볼 때나 요즘 직장에서 업무 할 때 요긴하게 쓰고 있는 것 같다.


하루는 큰딸이 와서는 "우리가 할머니 손에 컸으니까 우리 애들도 엄마가 키워주는 거지?"

헉! 내가 우리 애도 키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손주를 키울 수 있담? 아는 것도 없지만 다 까먹었는데!

"엄빠는 너희들 결혼하면 제주도 가서 살 거야" 하며 부드럽게 거절을 하자 아이 좋아하는 남편은

"그럼, 다 데려와 우리가 키워줄게"하는 것이다. 난 아직까지는 귀여운 사위가 보고 싶지 손주가 보고 싶지는 않다.  이러던 내가 손주를 쭉쭉 빨며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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