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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Jan 04. 2023

수몰 위기에 건져 낸 필레신전

아스완 댐, 필레신전, 미완성 오벨리스크

이집트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가 떠오르면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만 같고 해가 지면 엄청나게 추운 사막이 국토의 97%나 차지하는 이집트. 그 땅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6,500 킬로미터나 되는 나일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일강은 해마다 기름진 검은흙을 실어다 주어 대풍을 이루게 하는가 하면  그들이 살 집을 만들 진흙도 제공해 주고 교통수단도 되어 주고 해외 무역까지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강은 어떤 해는 홍수가 크게 일어 대지가 몽땅 호수로 변하게 하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그 수량이 너무 적어 가뭄에 시달리게도 했다. 


이집트인들은 살기 위해 그 물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일찌감치 1년 365일이라는 달력을 만들고, 상형문자까지 사용하는 등 발달된 문명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신과 동일시하던 강력한 군주 파라오의 지휘 아래 성곽까지 구비한  최초의 도시를 그 시대에 건설하였다.


인간은 무력한 존재임을 깨달은 그들은 초월적인 힘을 가진 자가 필요했다.  막강한 신을,  그것도 하나가 아닌 다양한 신을 믿었다. 태양 달뿐만 아니라 악어 황소등 삼라만상을 신성시하며 경배하게 되었고 거대한 신전을 지었다. 그리고 내세를 믿었던 그들은 살아서 사는 궁보다는 죽은 후의 무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미라를 만들고 벽화 속에 자신의 가족을 그려 넣음으로써 내세가 이어지기를 바랐다. 


아스완 댐 공사로 수몰 위기에 처했던 필레신전 

당시 영국의 통치 아래 있던 이집트는 그들이 아스완 댐을 건설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댐의 건설로  주변 경작지의 생산량은 증가하였고, 사막 지역은 녹지화되고, 수력 발전으로 얻은 전력은 이집트 전 지역의 필요전력 50%를 감당하는 데다 수려한 경관까지 갖추게 되니 관광자원까지 얻게 되었다. 


하이댐 기념비와 하이댐 전경

그러나 문제는 근방에 있는 20여 개의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댐 공사가 이뤄지며 1902년부터 신전들은 점차 물에 잠기고 있었는데 1960년 대 또 하나의 댐이 추가되자 섬 전체가 수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신전을 살리고자 나선 것은 이집트 정부가 아닌  유네스코였다.  24개국에 사랑의 모금 운동을 펼치며 필레신전은 구사일생으로 아길키아 섬으로 신전을 옮기게 되었다.

 

아스완은 카이로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오며 만나던 황량한 사막과 허름한 도시와는 사뭇 달랐다. 대추야자의 푸르름과 넘쳐나는 물이 있는 풍경은 생뚱맞기까지 했다. 배를 타고 10분쯤 갔을까? 드디어 아름다운 신전이 그 모습을 나타냈다.


'이집트의 진주'라 부르는 필레신전(이시스 신전)

이집트 시대 마지막으로 건립되었다는 필레 신전은 그 당시에도 아름다워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제국의 카이세르와 신혼여행을 왔던 곳이다. 이집트 신전에는 부조가 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이집트 신화에 의한 것으로 필레 신전은 어머니 이시스를 위한 신전이다. 


배를 타고 아길키아 섬으로 이동


신화 속 이시스 여신이  남편 오시리스가 시동생인 세트에게 살해당하자 그를 부활시키고는 세트를 피해 호루스를 낳아 파피루스 숲에 숨어 몰래 키우고, 젖이 나오지 않는 이시스는 하토르에게 젖을 먹이게 하고, 손가락을 빨고  한쪽 머리를 땋은 아이의 모습을 한 호루스 등 신화 속 이야기가 신전 벽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제1 탑문 안쪽에는 제사장과 귀족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비해 바깥쪽은 일반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물속에서 건져낸 신전의 중간쯤에는 물에 잠겼던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물결무늬는 신화에 나오는 태초의 혼돈의 바다를 상징하고 기둥들은 그리스 코린트 파피루스 등 복합 양식을 띠고 있다.


알렉산더가 들어온 후 헬레니즘 문화와 융합하며 황소뿔을 한 하토르의 엉덩이와 가슴이 튀어나오도록 새겨져 있다.

 

신전 가장 안쪽에는 이시스 신을 모셨던 지정소가 있다(좌), 높이 18미터의 제 1 탑문에서 파라오가 몽둥이로 적을 굴복시키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왕위를 놓고 싸워서 이긴 호루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가 오목하니 파인 것은 탑문 해가 동쪽으로 떠올라 비추이기 때문이라 한다.


둥근 돌기둥 머리에는 하토르 여신의 얼굴이, 그리스교의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신전의 벽에는  콥트교의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천천히 신전의 벽화에 빠져 있다 보면 마치 2,5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하다.  재미있는 생명체를 만들라는 라의 명령으로 인간을 만들던 크놈은 만들기가 귀찮아지자 인간의 몸에 자궁이라는 장치를 만들어 알아서 번식하게 했다는 이야기부터  사랑과 질투를 가지고 대치하는 너무나 인간 같은 신들의 이야기가 꽤나 흥미롭다.


그리스교의 예배당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신전은  콥트교와 이슬람교도들에게 이시스와 호루스의 얼굴을 정으로 쪼아 훼손당한 것을 볼 수 있다. 


미완성 오벨리스크를 보며 미루어 짐작해 본다.

어마무시한 그들의 석조 건축물을 보면 어떻게 그 큰 돌을 구하고 어떻게 그 시대에 옮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그 의심을 조금이나마 풀게 하는 곳이 바로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있는 화강암 채석장이다.

온통 돌로 된 돌산은 이리저리 파헤쳐져 있다. 5000년 전에 이곳에서 화강암을 채석했던 것일까?


제대로 완성했다면 최대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되었으련만 가운데가 쭉 갈라진 거대한 돌덩이는 그냥 버려져 있다. 게다가 물결무늬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은 그들이 어떻게 작업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돌에 구멍을 뚫은 후 나무 쐐기를 넣어 물을 부어 갈라지게 하고 갈라진 틈에 들어가 강한 돌로 내리찍다 보니 물결무늬가 나오게 된 것이다.  돌 자르기가 끝나면 홍수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가져다 대고는 운반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러니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만드는데 2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길이가 42미터나 된다는 미완성 오벨리스크


로마 이스탄불 등 유럽 각지에서 보는 오벨리스크 대부분이 아스완에서 생산된 것이란다. 오벨리스크는 바늘이라는 뜻으로 끝이 삼각형으로 되어 있다.  신화 속 태초에 떠오른 언덕 벤벤스톤을 형상화한 것으로 하늘로 향하고 태양과 같이 가고 싶다는 욕구로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는 하늘을 향해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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