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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Apr 16. 2023

강화도에서 꽃구경만 하실 건가요?

적성산 사고지, 전등사, 광성보, 고려궁지

태풍 같은 바람이 종일 불던 다음날 강화도에 다녀왔다.  쾌청한 하늘 아래 산기슭에는 아직도 희끗희끗하게 벚꽃이 남아있다. 섬이라 바닷바람이 차갑긴 한가 보다. 강화도는 콧바람 쏘이고 싶을 때마다 자주 찾던 곳인데 전등사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있던 곳이라는 것도,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 용감하게 나라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다. 


야트막한 산줄기를 따라 투박하게 쌓아놓은 성벽은 단군이 세 아들에게 쌓게 했다는  삼랑성으로 지금은 정족산성이라 한다. 산성 안에는 조선시대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와 사고수호사였던 전등사 그리고 병인양요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정족산성의 동문
정족산성의 남문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 있기까지

조선왕조실록은 한글과 더불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전 세계에서 50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기록물은 없다고 한다. 기록도 기록이지만 그것을 훼손하지 않고 지금껏 보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세종 때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에 보관 중이던 실록은 임진왜란으로 전부 불에 탈 뻔했으나 일본군이 금산을 넘어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호남의 유생 2명이 실록을 내장산에 가져다 놓음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족산 사고지



전쟁 후 선조는 실록을 읍내가 아닌 산간지방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5부를 만들어 춘추관을 비롯하여 강화도 마니산, 경북 봉화의 태백산,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평안도의 묘향산에 각각 보관하게 되었다. 전주 사고분은 마니산에 두었는데 그만 불이 나자 정족산으로 사고를 옮기게 되었다. 바로 그 사고지가 전등사 뒤편이다.



물론 정족산 사고지에는 조선시대 때 만들어진 전주 사고분을 보관하고 있지는 않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중이고 오랜 시간의 경과로 원본은 마치 나무껍질처럼 변했다고 한다. 실록은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하여 3년에 한 번씩 포세(곰팡이 등을 바람에 말리는 작업)를 한다고 한다. 묘향산에 있던 실록은 그 접근성이 떨어져 적상산으로 옮겼는데 6.25 때 분실되어 현재 김일성 대학에 보관하고 있다. 이제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지는 그저 관광지로 남게 되었으나 그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아도화상이 지은 절 진종사는 정족산사고의 사고수호사로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많은 고목들과 함께 하는 전등사는 지금 화창한 봄을 맞이하여 화려하기 그지없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다. 아도화상이 지은 절 진종사는 고려 충렬왕 때부터 전등사로 바뀌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선원보각)하는 정족산 사고의 사고수호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이 쳐들어 온 병인양요(1866년)를 승리로 이끈 양헌수 장군 

프랑스 선교사와 수많은 천주교 신도가 살해(병인박해)된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군이 강화도로 쳐들어 온 것이 병인양요다. 이때 조선은 구식 조총과 화포밖에 없었으니 프랑스군과 대항하기에는 상당히 역부족이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강화도 남쪽의 정족산성에서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을 용감하게 무찔러 승리로 이끌었으나 프랑스 군은 퇴각하면서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와 정족산 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의궤(297권)를 약탈해 가버렸다. 



그 후 프랑스의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박병선 씨가 조선왕조의궤를 발견하고는 프랑스와 협상하여 2011년 우리나라로 겨우 귀환하였으나 영구반환이 아닌 5년마다 프랑스의 허락을 받고 다시 빌려오는 임대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신미양요(1871년)의 격전지 광성보 

광성보의 안해루를 지나 소나무가 양쪽으로 멋지게 늘어선 길을 지나면 쌍충비각과 신미순의총을 만나게 된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지  5년 만에 다시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을 침공해 왔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조선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총사령관으로 있던 어재연 장군은 600명의 군사로 미국 군함 5대와 1,230명의 군사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광성보의 안해루
쌍충비각


어재연장군과 동생 어재순은 충북 음성에 안장하고 광성보에는 쌍충비각을 세웠다. 군졸 51명은 그 신원을 파악할 수가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고 신미 순의총이라 한다.


신미 순의총


신미양요 때 미 해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손돌목 돈대는 숙종 5년에 주변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평지보다 높은 곳에 설치한 군사기지다.


외곽초소였던 용두돈대는 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암반을 이용해 축조했다. 광성포대(우)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고려궁지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궁궐을 건립하여 39년간 사용하던 곳으로 몽골과 화친한 후 환도할 때 파괴하였다가 1977년 강화 전적지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어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등이 복원되었다.

고려궁지


동헌과 외규장각
강화 동종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부르는 강화도로의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실감 나게 했다. 역사적인 사건에 관심이 없을 때는 그저 아름답다고만 보았던 강화도가 좀 더 애절하게 다가왔다. 그저 감사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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