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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Oct 03. 2024

산다고 하기보다는 버텼다

절대 꾀병이 아니다. 며칠 전 외출했다가 돌아온 후로 밤새 기침을 해대더니 목이 잔뜩 부어올랐다. 나이가 들면서 찬바람만 불면 늘 기침 가래로 고생을 하고 있다. “벌써 시작되었나” 하고 병원에 다녀왔다. 

물약과 알약을 한 움큼씩 먹었는데도 밤새 끙끙 앓았다. 목 안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프더니 이젠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혹시 코로나? 어떡하지? 시아버님 뿐만아니라 가족들을 잔뜩 불렀는데..... 

    

가게를 할 때도 나는 늘 아팠다. 감기를 달고 살다보니 친정엄마처럼 조금만 아프면 ‘판피린’을 먹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바로 윗 층의 내과 의사는 내가 아프다고만 하면 그냥 주사를 서너 대씩 마구 놔 주었다. 마약성 진통제였는지 그것만 맞으면 그냥저냥 늦은 밤까지 버틸 수 있었다.    

  

빵가게를 하는 것이 큰 육체노동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쉬는 날 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해야 하기 때문에 늘 피곤이 누적되었던 것 같다. 기껏 힘든 일이라고 해봐야 학교에 빵 배달을 할 때뿐이었다.  학교 건물 4층까지 커다란 빵 상자를 들고 오르려면 2층만 올라가도 양 팔이 덜덜 떨렸다. 4층까지 올라가 배달을 끝내고 내려올 때는 다리의 힘까지 빠져 술 한 잔 먹은 사람처럼 갈지자로 걸었다. 


아마 회전근개가 그렇게 빨리 파열된 것도 이때 혹사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또 은행 다닐 때부터 목 디스크로 내내 고생을 했다. 통증은 서서히 허리로 손가락으로 내려가더니 발목까지 아팠다. 

“나는 아파도 가게 때문에 누워 있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용하다는 곳이란 곳은 다 찾아다녔다. 


매장 아르바이트 아줌마의 친구가 안마를 잘 하니 가보라고 해서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는 그녀의 집에 찾아갔다. 그렇게 오래 받지 않았는데도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안마사 아줌마가 마구 화를 내며 가게에 왔다. 전날 사간 빵에 문제가 있었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조용히 사정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을 손님들이 잔뜩 있는데 다짜고짜로 쳐들어와서 축축하고 탐욕스러운 눈을 아래위로 부라리며  난리를 치는 것이 아닌가! 그냥 고개 숙이고 화난 마음 풀릴 때까지 사과했으면 될 것을 그때는 원망하는 마음이 더 컸다.     


나의 사과가 부족하게 느꼈던 그녀는 다음날 다시 찾아왔다. 자기 친구가 이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자기도 무시하는 거냐며 삿대질까지 하며 또 난리다. 그때는 그만 기가 딱 막혀 먼 산만 바라보았다. 더 이상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돌아간 뒤 ‘너, 나 무시하는 거야’라는 단어가 깍깍대며 종일 따라다니는 바람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길가다 혹시 그녀를 만나기라도 하면 부르르 몸서리가 쳐졌다.


한 번은 기치료를 하는 곳에도 찾아갔다. 기치료는 안마하고는 조금 달랐다. 이제나 저네나 낫기를 기다렸지만 낫기는커녕 어느 날인가 원장의 손이 은밀한 곳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이것도 치료? 하며 가만히 참다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후 화내며 뭐라고 따지기도 창피해 미리 끊어놓은 횟수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 두고 말았다. 

“정말 별 미친 사람이 다 있다.”   

  

인디바라는 고주파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방배동까지 다녔다. 치료는 나의 복잡한 증상을 잘 치료해 주었다. 하물며 소화가 잘 안 될 때도 뜨거움을 참고 있다 보면 신기하게 위가 마구 뛰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는 이 치료를 계속 받지 못하면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멀어서 그곳까지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일 주일에 겨우 한 번 다녀왔을까?    

  

인디바 치료를 하는 그녀와는 금전 관계가 얽혀 있었다. 그녀가 한참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고 빌려준 원금을 치료비로 보상받고 있었다. 하지만 가게를 서너 시간 비우며 예약한 시간에 또박또박 맞춰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주 취소를 하였고 어느 날인가 갔더니 그녀가 마구 짜증을 내는 것이다.     

내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자기가 어려울 때 생판 모르는 내가 선뜻 도와주었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많이 서운했다. 


여직원에게 더 이상은 치료를 받으러 다닐 수가 없으니 남은 돈은 계좌로 입금시키라고 했다. 다음날 원장은 내게 사과하기는커녕 여직원을 시켜서 원금은 거의 다 갚았고 이자로 몇 번 더 치료는 해 줄 수 있단다. 기분이 너무 상한 나는 그 날로 발길을 끊었다. 마치 마약처럼 일 주일이라도 가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더니 여태까지 잘 살고 있다. 이렇게 아픈 몸 치료를 위해 퍼부은 돈만 해도 적지 않다.  

   

몸이 아픈 것보다 나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였다. 늘 가게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 흉몽이었을까? 

“아니, 꿈은 반대야.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아침에 눈을 뜨고 애써 태연한 척 웃어보지만 종일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꿈속에서는 거미줄까지 쳐진 허름한 가게 안에서 늘 혼자 허둥대고 있었다. 기계가 고장이 나서 빵을 못 만들기도 하고, 변변치 않은 빵을 늘어놓고 먼 산만 바라보기도 했다. 특히 성난 고객들에게 치이는 꿈을 꾼 날은 가게에 나가는 것조차 무서웠다. 이렇게 꿈속에서도 늘 빵집을 벗어나질 못했다.

      

빵가게를 그만둔 지 10 년도 훨씬 넘었지만 아직도 가끔 그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지금은 그만두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그저 흉몽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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