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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미의 세상 Oct 23. 2024

온 가족의 이름 앞에 붙은 '빵'

빵집을 하는 동안, 이름 세 글자가 분명히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그렇게 불러주지 않았다. 절에 가면 ‘빵 보살’, 수영장에 가면 ‘빵집 언니’, 동네 아줌마들은 ‘빵집 아줌마’라고 불렀다. 그때는 그게 너무 싫었다. 물론 남편이나 아이들에게도 ‘빵’이라는 글자가 붙어 ‘빵집 남편’ 또 ‘빵집 딸’이었다.


그 때문인지 딸들은 친구들과 집에 오다가도 일부러 빵집이 보이면 멀리 돌아서 집으로  갔다. 어쩌면 남편은 좋았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는 기껏해야 부장이었는데 직원들에게 사장으로 불렸으니 말이다.     

요즘 길을 가다 옛 손님을 만나면 

“빵집 아줌마! 아직도 여기 살고 계시네요.”

“네, ~ 님도 잘 계시죠?”

“어머나, 아직도 이름을 기억하고 계세요?”

글쎄 말이다. 좀 전에 혈압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뜬금없이 내 입에서 손님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마일리지 적립을 위해 등록했던 이름으로 그녀의 남편이나 아이들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절에 가면 스님은 늘 ‘빵 보살’이라고 불렀다. 

“아, 스님, 전 ‘진선화’라니까요.” 

“왜, 빵 보살이 어때서”

스님이 이러시니 다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했던가! 어딘가 여행을 가면 전직이 드러났다. 은행원이었던 나는 여행지에서 서류에서 보던 은행을 실제로 보면 그렇게 반가웠다. 

“이궁 S사 문제로 어지간히도 속을 썩이더니.....”

“어, 여기는 LA인데 호주은행이?? 아~ 지점”

은행 경력 22 년 차였던 나는 별의별 일이 다 있었고 그 은행과 상관없는 사건으로 기억하는 은행들이 있었다.   

  

일본 은행에서 일했던 나는 특히 일본 여행을 할 때 감회가 남달랐다. 일본에는 은행이 얼마나 많은지 은행 이름이 ‘77th Bank’ ‘Hyakugo(105라는 뜻) Bank’도 있다. 서류상으로만 보던 은행이 차창 밖으로 지나면 마치 시골뜨기가 서울에 처음 올라온 것처럼 방방 뛰며 좋아했다. 누가 그런 나의 속마음을 알까?  

   

어디 은행뿐이겠는가? 빵집을 시작한 후에는 그렇게 빵과 빵집이 보였다. 한 여행지에서는 도시의 모습을 담기 위해 일찌감치 카메라 한 대만 둘러메고 나왔다. 장터 같았는데 푸드 트럭에서 파는 빵을 사려고 이른 아침부터 꽤나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제과점하면 건물 중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화려하게 인테리어를 하고 영업을 하고 있는데 말이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기다렸다가 따끈따끈한 빵맛을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별로 없어 지나치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스탄불이었나? 길가에 가득한 디저트 가게를 보고는 너무 좋아 두 눈 반짝이며 이집 저집을 마구 돌아다녔다. 어쩌면 저렇게 앙증맞고 예쁘게 만들어 놓았을까? 디저트는 그랜드 바자르에서 보았던 카페트와 공예품처럼 화려하고 정교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만들어 팔고 있는 빵이 촌스럽게 보였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다식이나 전통 떡들을 예쁘게 포장해 놓으면 그에 못지않을 게다.


우리의 빵은 주식이 아니다 보니 대체로 단맛이 강하지만 외국에서는 빵이 주식이라 곡물이 많이 들어가 담백하다. 물론 오래 씹으면 설탕의 단 맛이 아닌 천연 재료의 고소함과 풍미를 느낄 수 있지만 달고 부드러운 빵에 익숙해진 내게는 바게트 말고는 그다지 맛이 없다. 


하지만 10 년 넘게 빵집을 운영하다 보니 밀가루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도 가끔  빵을 찾게 되었고 관심도 많아졌다. 요즘에도 커피 한 잔하러 대형 카페에 들어가면 커피는 대충 고르고 쇼케이스에 있는 빵만 본다. 

‘무엇으로 만들었지?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만든 거야?’ 


빵도 유행이 있는지 전과 많이 달라졌다.  이렇게 이름에만 ‘빵’자를 달고 산 게 아니라 빵은 내 삶 깊이 파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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