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봉산, 단풍
사실 곰배령을 이 가을에 간 것은 단풍 지도에서 가장 먼저 단풍이 든다고 해서였다. 얼마 전 중국에서 본 가을 모습은 단풍나무가 없어 그냥 황금빛이었다. 너무 아쉬운 마음에 찾은 곳이다. 단풍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은행나무 뒤에서 붉게 타오르는 단풍이 있어야 제격이지 않을까?
새벽부터 달려왔건만 하필 오락가락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에 반짝이는 단풍잎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다. 뭐 어쩌겠는가? 입산 확인이 끝나자 곰배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무 끝에 방울방울 맺힌 물방도, 비를 흠뻑 맞은 이파리들도 기대 이상으로 예뻤다. 설악산 계곡도 아닌데 계곡은 또 얼마나 넓은지 어제 내린 비 때문인지 물소리도 우렁찼다.
잔뜩 흥이 나서 둥실둥실 어깨춤까지 추며 남편의 등짝을 세게 치며 소리를 지른다.
"여보, 너~무 좋다. 여기 온 거 잘했지?"
무뚝뚝한 우리 남편, 풍경은 볼 생각도 않고 다리가 시원찮은 마누라를 위해 등산 스틱만 챙기도 있다.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내가 스틱을 사용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 이게 가을의 찐 모습이지!'
도대체 따라오지 않는 마누라가 신경이 쓰이는지 남편은 가다 서기를 반복한다.
비 오는 가을날의 산행도 좋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몇 주 전에 해놓은 예약 때문에 억지로 왔지만 의외로 좋았다. 다만 비가 와서 등산로의 패인 곳에 물이 고여 있어 피하며 조심조심 걸어야 했고 땅이 온통 질퍽거리는 바람에 등산화며 바지가 온통 흙투성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행인 것은 곰배령 가는 길이 그다지 험하지 않다는 거다. 거의 중턱 지나서는 살짝 언덕길이 있지만 그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 있다. 갑자기 야생화 생각이 났다. 지금은 가을이라 하나도 없으려나? 그저 단풍잎 보느라 땅아래를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왔다. 하긴 쌓인 낙엽 때문에 피었다 해도 낙엽에 깔려버렸을 것 같다.
어느새 꽤 올라왔는지 단풍잎은 보이지 않고 양치식물뿐이고 나무들은 이파리가 거의 떨어져 마치 스산한 겨울 같았다. 죽어서 천 년 간다는 주목은 아니라도 길가에 빠개지고 떨어진 나무의 형상이 기괴하고 멋스럽다.
드디어 정상이다. 이곳에 봄이면 야생화가 만발하나 보다. 지금은 딱 늦가을의 스산함이 느껴졌고 바람은 또 어찌나 센 지 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든다. 발아래 보이는 많은 산을 보니 점봉산이 꽤 높은가 보다. 점봉산 표지석 앞에서 인증숏을 찍으려고 기다리고 기다리다 센 바람 때문에 그저 표지석만 찍고 내려왔다. 점심은 저쪽 산 위에 올라가 먹으라지만 바람을 가려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아 그냥 내려와야 했다.
찬 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늦게 내려왔기 때문일까? 오를 때는 정체까지 이루던 많은 사람들은 어느새 다들 내려갔고 우리뿐이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사람들은 제대로 보고는 갔을까? 비슷비슷한 모습일지 모르지만 이 아름다운 모습을 어떻게 그냥 스치고 가버렸을까?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올해도 이상기온 현상으로 단풍이 예쁘게 들지 않았고 또 아래부터 단풍이 들며 올라가다 중간에 그냥 멈춰버리고는 나뭇잎들이 떨어지고 말았단다. 이제 싱싱한 단풍잎 보기도 힘들게 생겼다. 좀 덜 싱싱하면 어떠랴. 이 풍경을 보고 온 것만으로도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