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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머님과 부부의 연이었을까?

by 마미의 세상

"어머님 다음 주에 곱창전골 해다 드릴까요?"

"그래"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시는 시어머니는 구십 넘은 노인이 아닌 꿈 많은 어린애 같았다. 그렇게 어머님과 약속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는 냉동고에 고이 모셔 둔 소곱창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우리가 요양병원에 갔던 날도 기침이 좀 심하다 싶긴 했는데 갑자기 병이 악화되더니 폐렴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머님 돌아가신 지 벌써 석 달째다.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된 것도 직접 보았는데 영 실감이 나질 않는다. 냉동고를 열 때 보이는 곱창을 볼 때마다 울컥하는 바람에 얼른 문을 닫아야 했다. 모레가 어머님 생신이다. 돌아가시고 첫 생일은 챙긴다는 말에 지난 주말 시댁 식구들과 산소에 다녀왔다.

정식 제사도 아닌지라 평소 어머님이 좋아하시던 김치만두, 곱창전골, 롤케이크 등을 준비해 갔다. 어머님은 향이라도 음미하고 가셨을까? 그렇게라도 해다 드리고 나니 얹혔던 속이 조금은 풀린 것 같다.


시부모님을 좋아해서 매주 시댁에 갔던 것도 아니고, 어머님을 많이 좋아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쩌다 시댁에 다녀오기라도 하면 서울에 오는 내내 남편에게 불평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욕심도 많고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말씀하시는 시어머님을 볼 때면 화가 치밀곤 했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의무만 하고 신경을 끊어야지 하며 멀리하려다 보면

"어미야 안 오니? 보고 싶다"

그 한 마디에 나는 금세 무너져서는

"어머님 에비와 주말에 갈게요."

시댁에 내려갈 때면 늘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갔다. 음식을 달게 하는 며느리 음식이 입에 맞을 리 없었겠지만 늘 반가워하시는 어머님이 생각나 시댁에 갈 때면 이삼일은 반찬을 만들곤 했다.


언젠가 재미 삼아 사주 뭐 그런 것을 보러 갔었다. 이것저것 맞춰보더니

"참 희한하네. 자네는 시어머니와 부부의 연이 있어."

인연 때문이었을까? 투정을 부리기는 했어도 어머님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물론 같이 살았다면 이렇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살지는 않았겠지만 많이 만나야 1 년에 열 번도 안되니 사이가 틀어질 시간도 없다.


두 딸을 키워주시던 친정엄마가 늘 우리 집에 사셨기 때문에 시부모님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솔직히 없었다.

친정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겨우 시부모님이 보였다. 여름휴가 때 시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면 그렇게 좋아하셨다.


요즘은 여행이라고 해 봐야 두 분 다 거동을 잘 못하셔서 케이블카나 바다 열차와 같은 기구를 타거나 드라이브를 해 드리고 평소에 못 드시던 게나 회를 사드리고 오는 게 전부였지만 두 분 다 너무 좋아하셨다. 작년에는 속초 바닷가의 대관람차를 태워 드리려고 갔다가 계단이 있어 타지 못하고 고성의 전망대만 보고 속초로 다시 와서는 물회를 사드리려고 갔다가 대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바로 옆의 조개구이 집으로 갔다.


집에서는 잘 드셔보지 못하던 음식이라 허겁지겁 드시던 어머니는 아마 덜 구워진 조개를 드셨는지 그만 패혈증에 걸리시고 말았다. 마음의 준비까지 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쇠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그대로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가는 평생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을 지경이었다.


일어나 앉지도 못하시는 어머님과 아버님을 서울로 모셔와서는 이것저것 해 드리다 보니 어머님이 겨우 털고 일어나셨다. 정말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렇게 며느리를 위해(?) 1년 넘게 더 사신 어머님은 결국 화장실에서 넘어져 고관절을 다치시더니 폐렴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다.


어제부터 갑자기 날이 확 풀리더니 산수유도 목련도 개나리도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 작고 여린 생명을 보는데 왜 자꾸 눈물바람인지 모르겠다. 돌아가신 친정엄마 얼굴도 생각이 나지 않는데 자꾸만 시어머님 얼굴이 떠오른다.

"어머님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사세요. 그리고 귀하고 착한 아들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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