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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너 때문이었어!

by 마미의 세상

이른 새벽, 눈 뜨자마자 냉큼 창가로 갔다. 정말 눈이 내렸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장난감처럼 세워진 자동차들은 하얀 눈에 뒤덮여 형체조차 알아볼 수가 없다. 한껏 들떠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너무 컸는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며 나오던 남편은

“굿모닝~ 우리 마나님, 오늘 기분이 아주 좋은가 봐!”

“여보, 밤새 눈이 잔뜩 왔어.”

출근길이 걱정되어 창밖을 살피는 남편과 달리 수북이 쌓인 눈에 잔뜩 들뜬 나는 싸라기눈처럼 나풀거리며 식사 준비를 했다.


올 겨울 첫눈은 11월에 내렸었다. 하필 공연 리허설 날이었다. 온통 공연에 신경 쓰느라 간밤에 눈이 온 것도 모른 체, 현관문을 나서다 그만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몇 년 전 강원도에 놀러 갔다가 밤새 내린 눈에 자동차가 눈에 푹 파묻힌 것을 본 이후로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린 건 처음이다.


아직 제대로 마르지도 않은 단풍잎 위에 내려앉은 눈은 한 뼘은 되어 보이는데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고 예쁘던지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바로 뒷나무의 가지가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처참하게 부러져 내렸다. 서울에서 폭설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다니!


잠시, 눈 덮인 가지가 춥지는 않을까 하고 바라보다가 엉뚱하게 아무도 밟지 않은 놀이터 잔디에 마구 발 도장을 찍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다시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하얀 눈과 푸른 가지 사이에 싱싱하고 빨갛게 빛나고 있는 산수유였다. 아침저녁으로 이 길을 수없이 다녔는데 아파트 정원에 산수유나무가 있는 줄 몰랐다. 그때 요란한 파열음 소리를 내며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버스를 놓칠세라 정신없이 뛰었다. 그렇게 멋진 첫눈이 오던 날을 아쉽게 보내고 말았다.


그러다 오늘 다시 눈이 온 것이다. 오늘 오후에는 시낭송회가 주최하는 시낭송 뮤지컬을 보러 가기로 했다. 지난 석 달 동안 지겹도록 만났던 단원들이지만 못 본 지 보름이 지나고 나니 뜬금없이 그들이 다시 보고 싶다. 다들 공연 후의 허전함을 어떻게들 채우고 있을까?


강아지와 함께 아침 산책에 나섰다. 포근한 날씨 덕분에 어느새 내린 눈은 거의 녹아내려 아스팔트는 마치 봄비라도 내린 듯 촉촉하다. 강아지가 눈 쌓인 산책길로 냅다 달려가는 바람에 난 거의 뛰다시피 끌려가야 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쌓인 눈 아래 낙엽이 바사삭 부서졌다. 뜬금없이 달콤했던 옛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창밖에 눈 내리는 모습만 봐도 소리를 지르며 가슴이 콩닥거렸다. 멋진 곳이 아니어도, 남자 친구와 눈 내린 길을 걷기만 해도 하늘을 날 것 같았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이 길을 같이 걸으면 헤어진다던데!”

“다 미신이야”

그 길을 같이 걸어서였을까?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내 어깨를 지그시 잡아주던 따뜻하고 큼직했던 손,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입김에 가슴이 왜 그렇게 쿵쾅대던지. 그들이 좋아서? 아니면 하얀 눈이 만들어 낸 분위기 때문에? 그때 생각만 해도 온몸이 후끈 달아오른다.

'그때가 좋았지"


시낭송 공연 후, 단원들과 함께 회식 후 노래방까지 가게 되었다. 솔직히 좀 불편한 사람이 있어 피하고 싶은 자리였다. 지난 공연 때부터 합류한 그는 늦게 온 데다 나이도 많아 연습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지하철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곤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부담스러운 눈길과 그의 거친 손길이 부담스러웠다. 그 후 일부러 지하철이 아닌 버스를 타며 멀리 했다.


오늘도 그는 노래방에서 무례하게 굴었다.

“인생 뭐 있어? 오늘 가장 행복하게 살면 되는 거야. 사실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하나 있거든.”

‘어머, 이 남자 미쳤나 봐’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 또 그 무지막지한 손길을 피하느라 내내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으며 종횡무진해야 했다. 노래방에서 나오자마자 집에 홀로 있는 강아지를 핑계를 대며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같이 간 후배들은 아무렇지 않게 서로 손도 잡고 춤도 추며 즐겼지만 이제는 그런 자리가 영 편치 않다.


이른 아침부터 내린 눈 때문에 한껏 들떴던 내 기분은 처참하게 뭉개져 버렸고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아파트 입구의 은행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몇 개의 은행들이 밤바람에 흔들리며 오들오들 떨고 있다.

아파트 도어록을 누르자 문이 부서져라 왈왈 짖어대는 강아지 소리에 이어

“늦었네~”

내 남편이 거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무거웠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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