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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 윤 Mar 15. 2021

둥근 것들의 비애

둥근 것들은 그렇게 몸을 안으로 감싸고 있다.

      

 거제 바닷가다. 이 곳 바다는 몽돌과 입 맞추어 노래하는 파도소리가 일품인 곳이다. 사람을 피해 자꾸 자연 속으로 파고든다. 파도가 돌에 부딪쳐 차르르거리며 하얀 거품을 내뿜으며 드나들었다. 원래의 모습이 무슨 모양이었는지 알 수 없는 작은 조개의 흔적과 검은 몽돌들. 서로의 일정한 간격을 두고 머물고 있었다.  

“넌 누구를 이기고 싶은 마음이 없어?” 

누군가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기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싶다. 나도 두말할 것 없다. 경쟁사회에서 진다는 것은 낙오를 뜻한다.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이긴 자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러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한다. 

 그의 답은 달랐다. “왜 꼭 이겨야 하지?” 이길 수 있으면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열심히만 한다는 것이다. 어느 가수 이야기다. 그는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해도 언제나 웃고 있다. 어리벙벙한 모습의 그가 경쟁이 치열한 방송계에서 살아남아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겉모습이 다는 아니지 싶다. 성격이 원만하다는 말이다.

 원만하다는 뜻을 다시 음미해 본다.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뜻과 모자람이 없고 충족한다는 뜻이 있다. 성격으로의 원만은 둥글둥글하니 어디에서든 잘 어울려야 귀염 받고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게 어머니는 성격에 모가 나서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없어 그렇다며 걱정했다. 그럴 수도 있다 이해한다.

 화가 많은 사람, 우리는 성격에 모가 난 사람이라 말한다. 수양하고 많은 깨달음을 얻어야 원만한 성격이 된다고 여긴다. 그 과정을 생각하면 어렵다. 큰 바위에서 어느 날 뚝 떨어진 네모와 세모 모양의 돌들이 비바람에 시달리고 파도에 괴롭힘을 받고서야 둥근돌이 된다. 얼마나 힘들고 아팠을지 짐작이 간다.

 철이 빨리 든 사람은 대부분 성격이 원만해 보인다. 나도 철이 빨리 들었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칭찬을 듣는 것 같아 더욱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않고 대부분 혼자 삼켰다. 좀 힘들어도 내가 조금 참으면 편했고, 누군가 끝까지 아니라 어기면 수긍해 주었다. 겉으로 남을 배려하는 것 같지만 속으론 아니다. 그저 내가 편하게 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다. 우리 학교에는 ‘5성 어린이’ 상이 있었다. 선행의 의미대로 착한 일을 하면 ‘선행장’을 주었다. 그것을 다섯 장을 모으면 1성 어린이 상을 주고 또 그렇게 모으면 단계적으로 5성 어린이 상을 주었다. 난 그 상을 타기 위해 방학 동안 학교에 나가 화분에 물도 주고 아침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가 운동장 청소를 했다. 공짜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일등으로 5성 어린이가 되었다. 아마도 그 상을 받는 날 엄마도 함께했던 것 같다. 엄마의 웃는 모습이 좋아 난 무엇이든 했다. 모두 “아이고 착하다. 어찌 저리 철이 빨리 들었노. 논실댁이는 딸내미 하나는 잘 키웠다.” 하는 소리가 가장 듣기 좋은 칭찬이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난 내가 둥글고 뭉텅하게 살려 노력했다.

 칭찬은 굴레다. 칭찬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다. 난 열심히 죽으라 하는데 그 대가는 칭찬보다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넌 착하니까 이것도 해줘.’ ‘넌 다 이해하니까 날 이해해줘’라며 다가왔다. 그렇게 난 그들 사이엔 그래도 되는 사람, 너무 고지식해서 재미가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둥근 것들은 그렇게 몸을 안으로 감싸고 있다. 누구도 옆에 붙어 앉지 못하게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난 가끔 화장실 바닥에 붙은 타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원들은 이기적일 수도 있겠다고. 세모와 네모는 빈틈이 없이 서로에게 기대어 편안해 보인다. 반면 동그란 것은 아주 조금의 몸을 허용할 뿐 함께하지 못한다. 다른 무엇인가가 빈틈을 채워 주고 있다. 

 둥근 지붕을 보라. 이름 있는 왕들의 지붕은 둥근 모양으로 부드러워 보인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학대와 멸시를 감추고 우아하기까지 한다. 지친 새 한 마리, 배고픈 길고양이 한 마리 앉아 쉴 수 없는 곳이 둥근 지붕이다. 궁궐을 지탱해주는 기둥도 그렇다. 누구 하나 기둥 뒤에 숨죽이고 숨을 공간이 없다. 겉과 속이 다른 여유로움이다.

 모든 것이 둥글다면 세상은 재미가 없지 싶다. 한 구슬이 모여 있는 친구들에게 함께 놀자며 살짝 다가갔더니 우르르 몸을 감싸고 흩어져 버렸다며 기분은 어떨까? 자신 탓이라 자책하며 또 혼자 울게 뻔하다. 세모와 네모는 다르다. 비석 치기 할 때 돌 하나가 뚝 내려치면 둘은 금세 사이가 좋아 딱 붙어 있다. 얼마나 보기 좋은 일인지 모른다. 뒤 끝이 없다.

 둥근 것들은 속으로 곪는다. 귀찮아서 참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 ‘그래 너 잘났다’하고 넘어간다. 그러니 그 속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이고 쌓여 한 번은 폭발하고 만다. 그때는 아무리 모가 나 거칠다고 여겼던 사람도 감당하기 어렵다. 흔히 ‘조용하던 사람이 한 번 화가 나면 무섭다’라는 말을 한다. 쌓인 것이 많아 뒤끝이 작렬하다.

 나는 어디에 속할까? 아마 네모로 태어났지 싶다. “농담을 잘하는 사람들이 속으로는 비애가 있다. 고통을 잊기 위해 농담을 한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나도 누군가와 있으면 정적이 무서워 떠들어 된다. 둥근 성격으로 태어 낫다면 그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한다. 그래서 싶게 무리 속에 스며드는 것이 두려울 때가 있다. 뒤에 찾아오는 허전한 때문이다.

 길들여진 삶은 이제 편하다. 웃는 연습을 하고 남의 말을 들어주는 연습을 한다. 삶도 연습이 필요하다. 저 몽돌들의 편안한 모습에서도 느낀다. 수많은 파도의 괴롭힘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선천적으로 둥근 사람은 어느 것과도 부딪히지 않는다. 세모도 안아주고 네모도 안아준다. 나도 이제 그들과 비슷하게 되어간다. 어느 것을 안아도 아프지 않다.

 모두 각자의 성격대로 살자. 세모와 네모는 겉으로는 뾰족하지만, 마음이 넓어 뒤끝이 없다. 그들은 조금 딱딱하고 거칠어도 그 면들에 기대어 앉을 수 있게 다 내어 준다. 내가 많이는 살지 않았지만 화가 날 때 화내고 또 빨리 사과하고 사는 삶도 괜찮다 여긴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귀퉁이가 부드러워진다. 조금 모가 나도 좋다.     

 작은 몽돌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매끈함에서 전해지는 차가웠던 느낌이 조금씩 따뜻하고 편안함으로 변했다. 앙증맞고 귀엽다는 소리 듣기 위해 견뎌 온 이에게 수고했다 어루만져 주었다. 이제 너무 참지 말고 더 넓은 바다와 갈매기에게 가끔은 속마음 이야기하며 편하게 지내라 위로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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