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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 윤 Feb 21. 2020

무심코 그린 얼굴

내 얼굴 너머로 그린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다 사라진다


나는 오랫동안 지독한 사랑에 빠져있다. 버릴 수도 잊을 수도 없는 나 혼자만의 사랑이다. 많고 많은 사랑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혼자 하는 사랑이라고 한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혼자 그리워하고, 보고파하고, 혹시나 하는 기대에 설레기도 한다. 그 사람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슬퍼지기도 하다.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그리움이 커진다면 내 그리움은 무한대다. 나는 그런 사랑을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하고 있다.

 

  해마다 내 생일인 오월이 되면 그 사랑은 그리움이 되어 아픔으로 다가온다. 따스한 눈빛도, 마주치는 미소도 본 적조차 없어 더 서글프다. 막장 드라마에서처럼 어느 날 내 앞에 노숙자의 모습으로라도 한 번 왔다 갔으면 좋겠다. 그가 너덜너덜 다가와 슬퍼하는 내 등 두드리며 슬픈 미소라도 한 번 지어준다면 나는 함박 웃어주겠다. 


 나는 유복자이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쉰이 채 되기도 전에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가셨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음력 2월에 당신의 묏자리를 손수 정리하고 만삭인 어머니와 어린 언니 둘을 두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가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시고 두 달 만에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그때부터 나만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언니와 나는 어머니를 따라 마을 어귀에 있는 밭에 종종 갔다. 어머니는 밭일하느라 바빴다. 밭 한 구석진 양지바른 곳에 아버지의 산소가 있었다. 산소의 잔디는 햇빛을 받아 누런 황금빛이 도는 비단 같았다. 산소 뒤엔 소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싸여있고, 입구에는 향나무 두 그루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우리는 늘어진 향나무 위에 올라가 그네 타듯 놀았다. 그곳이 우리의 놀이터였다. 

 

우리는 산소 앞에 놓인 반듯한 돌에 걸터앉아 노래를 불렀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하늘나라 가신 아빠는 소식도 없고...’ 우리는 가사를 바꿔가며 불렀다. 산소 미끄럼도 탔다. 어머니가 깔아 놓은 포대기에 언니와 나란히 하늘을 보고 누웠다. 구름들이 파란 화폭에 멋진 그림을 그리고 바람은 시원하게 콧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이 감기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언니들이 어떤 중년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나도 종종걸음으로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 온 힘을 다해 따라갔다. 그는 얼굴에 햇살이 비쳐 흐릿하게 형태만 보였다. 아무리 까치발을 하고 보려 해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와 언니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즐거워 보였다. 나도 언니들의 틈을 헤집고 들어갔다. 내가 가까이 가면 그 사람은 내가 걸어 간만큼 멀어져 저만치에 서 있었다. 언니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지금도 가끔 같은 꿈을 꾼다. 누군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나 혼자다. 아무리 돌아봐도 아무도 없어 울다가 눈을 뜨면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기도 한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다. 혼자라는 것이 슬프고 무서웠다. 얼굴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겁이 났다. 어쩌면 아버지는 얼굴을 보여 주었지만 내가 그를 본 적이 없어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흔들었다. 거울 속에 혼이 반쯤 빠진 내가 있다. 그렇게 가끔 가슴으로 느끼고 머릿속에서 그린 것을 합하여 아버지 형상의 도깨비를 만들고, 또 추억도 쌓아 간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도깨비가 나타나 나 혼자 힘들게 쌓아 둔 추억마저 잊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어머니는 ‘아이고, 얄궂다. 니는 나이가 들수록 우째 그리 너거 아부지를 더 닮아 가노?’ 하셨다. 난 아버지에 관심이 없는 척하며 가끔 거울 속의 나를 관찰한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은 머리숱이 많으며 반달 모양의 눈썹에 푹 들어간 눈이 껌벅이고 있다. 약간 검은 피부에 양 볼엔 살이 없고 조금 긴 얼굴이다. 내 얼굴 어디서든 상상 속의 아버지 모습을 열심히 찾고 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대 꿈을...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아 본 적 없는 얼굴, 그저 내 모습에서 그려내는 그의 얼굴이 전부다. 내가 좋아하는 현빈도 되고 장동건도 된다. 마음이 가는 대로 그리다 보면 슬픔에 찬 내 얼굴이 보여 눈물이 밀려오기 전에 얼른 지워버린다.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치면 서로 슬픈 웃음을 짓는다.


기력이 쇠약해진 어머니는 요즘 아버지가 꿈에 자주 보인다 했다. 어머니는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나 놀러 다니다 혼자 키운 막내딸을 자랑하고파 “우리 유복자 집이다. 들어가자.”라고 말했단다. 슬픈 눈을 한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며 “내가 와 모르겠노. 다 안다. 무슨 염치로 여기를 들어 가노. 어여 들어가소. 자네가 대신 고맙고 미안하다 전해주소.”하며 힘없이 돌아선단다. 어머니의 그 말에 “영감 제이 알기는 뭘 아노. 그래도 염치는 있는 가베. 안 들어오는 것 보니까.”하며 나도 모르게 퉁퉁거렸다. 그 퉁퉁거림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대로 들어 있음을 어머니는 알고 있다.


내 눈에 우수가 들어있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싫다. 보지도 느끼지도 못한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이 남겨두고 간 흔적들 때문에 상처 받고 싶지 않다. 그 사랑을 이야기하는 엄마도 가끔은 싫었다. 나이 오십이 넘어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그 상처로 병들어 꼼짝 못 하고 나만 바라보는 엄마가 내 아픔이라 더욱 슬프다. 세월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무심코 그렸다 지우는 얼굴의 무게는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내 얼굴 너머로 그린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다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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