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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 윤 Feb 25. 2020

가로수

자식은 그렇게 끝까지 이기적이다

  그럴 때가 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쳐지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랬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한없이 빠져든다. 쳐진 몸을 추스르고 운동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바람이 제법 불었다. 바람에 모든 것이 날아가 버렸는지 하늘은 유난히 맑고 깨끗했다. 차가움이 눈으로도 느껴지는 겨울이다. 옷깃을 한껏 세웠다. 목이 자꾸 외투 속으로 한 파고들었다. 길이 미끄러워 아기처럼 아장아장 걸었다. 세상이 조용했다. 


 신호등의 녹색불이 깜박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뛸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다음 신호를 받기로 했다. 여기저기 눈길을 돌리며 맑은 겨울을 즐기며 걸었다. 그때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벌거벗은 나무에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란히 두 그루가 그랬다. 나무의 한기가 나에게로 전달되어 소름이 돋았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지만 떨고 있을 나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왜 하필 거기다 버린 것일까? 누가 그랬을까? 무거운 마음 탓에 운동이 되지 않았다. 보도블록으로 덮어 놓은 가로수. 겨우 땅의 공기를 내뱉을 수 있을 정도의 숨구멍만으로도 힘들어 보인다. 이리저리 얽혀있는 전깃줄에 걸려 마음껏 자랄 수도 없다. 그조차 모자라 우리의 편리대로 몸뚱이만 남겨 둔 채 가지들을 잘라버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애써 추슬렀던 마음인데 다시 춥다. 나무는 자신의 몸은 생각하지 않는다. 차들이 뿜어대는 매캐한 매연조차 자신들의 몸을 통해 깨끗이 정화시켜 조용히 내어준다. 몸뚱이마저 잘려나간 나무들은 ‘너에게 더 줄게 있으면 좋겠는데,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늙어 버린 나무 밑동밖에 안 남았어. 미안해.’하며 미안해한다. 그렇게 가로수는 우리에게 줄 것이 없어 안타까워한다.


 주기만 하고 말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것에 우리는 관심을 주지 않는다. 너무 당연하다 여긴다. 받는 삶에 익숙해진 우리는 그렇게 받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지켜 줄 꺼라 믿는다. 받는 것에 버릇이 되어 더 이상 사랑을 받지 못하는 날이면 투덜거리고 등을 돌린다. 나무의 사랑이 끝나면 사정없이 베어버리기도 한다.

 부모들도 그렇다. 자식들은 하나를 가지면 둘을 요구하고, 부모는 둘을 주고도 더 줄 것을 찾는다. 부모는 항상 미안해한다. 어린 자식에게 용돈을 주지 못한 것에 마음 아파했고, 내가 원하는 만큼 공부시켜주지 못해 아쉬워했다. 울 엄마는 그랬다. 서른여섯에 혼자되어 어린 세 딸들을 키웠다. 이별의 아픔을 알기에 당신도 행여나 딸들을 두고 일찍 갈까 걱정이었고, 지금은 오래 살아 자식에게 폐가 될까 한숨을 쉬신다. 부모는 좋은 일도 궂은일에도 자식들 생각뿐이다. 

 

지난여름에 넷째 시누이 집에 갔었다. 시누이의 아들 내외와 딸이 와있었다. 그 아들이 두 돌 지난 자신의 딸을 얼레고 있었다. 예뻐서 어쩔 줄 몰라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누이가 “야이, 이놈아. 나도 니 그렇게 키웠다. 니 새끼는 그렇게 예쁘제.”했다. 참 많이도 속을 썩였던 아들이라 조금은 섭섭했는지 툭 한마디 던졌다. 또 그 아들은 엄마가 언제 하는 의아한 표정을 짓다 결국 등짝을 한 대 맞고야 웃었다. 자식은 저 혼자 큰 줄 안다. 부모가 자신에게 해 준 일보다 섭섭하게 했던 일만 기억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두 아이의 부모가 된 지금도 엄마에겐 “사랑한다.” 소리 한번 해보지 않았다. 쉰이 넘어도 난 엄마의 자식에 불과했다. 내 아이들에게는 하루에 한 번 사랑의 이모티콘을 폰으로 날려 보낸다. 자식에게 하는 십 분의 일만 부모에게 한다면 이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싶다. 말로는 알지만 현실적으로는 참 어렵다. 신이 세상 자식들을 보살피기 어려워 엄마를 만들었다는 말처럼 엄마는 베푸는 삶을 살 뿐이다. 

 

엄마는 맛난 음식을 두고 혼자 드시는 법이 없다. “니도 묵어라.”하시며 내 쪽으로 내민다. 맛있는 반찬은 모두 자식 쪽으로 내민다. 엄마는 비록 작고 약했지만 그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따뜻한 밥을 먹이려 노력했다. 따뜻한 밥을 먹고 다녀야 나가서 기죽지 않는다며 챙겼다. 추운 겨울 갈아입을 내의도  미리 이불속에 넣어 데워 주었다. 부모들은 온통 자식 생각만 한다.

 

나도 두 아이의 엄마다. 자식일 때의 나는 까마득히 잊고 부모로서 나만 보인다. 엄마가 된 내가 자식일 때 받았던 사랑과 관심을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다. 추워도 더워도 즐거워도 슬퍼도 아이들이 먼저 생각난다. 특히 먹을 것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매일 끼니가 되면 “밥은?”하며 묻는다. 그런 나를 앵무새 같다고 “엄만 매일 밥만 드셔요?”라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아마 귀찮다는 표현이 분명하지만 난 엄마니까 어쩔 수 없다.   


 사랑 중에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짝사랑이다. 그중에 제일은 내리사랑이다. 이제 주는 사랑과 받는 사랑의 차이를 알 것 같다. 주는 사랑은 조건도 바람도 없어 서운함이 없다. 받는 사랑은 다르다. 받는데 익숙해지면 더 많은 사랑을 요구한다. 부모가 우리의 곁을 영원히 떠날 때도 그렇다. 부모의 포근한 품이 그립고, 내가 위로받을 곳이 없어져 대성통곡하며 운다. 자식은 그렇게 끝까지 이기적이다. 

 

나무를 가만히 만져 보았다. 까칠하고 차가웠다. 어린 시절 조용히 이불속에서 녹이던 엄마의 손 같다. 얼음을 발로 대충 밀어내어 주었다. 앙상한 가지에 남은 잎들이 바람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주고 매달려 있다. 가지 위로 까치 한 마리가 푸드덕 내려앉았다. 가지가 휘청하더니 곧바로 중심을 잡고 행여 까치가 떨어질까 얼른 자리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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