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힐링하고 싶었던 비 오는 주말 저녁, 아껴둔 달콤한 디저트를 꺼내듯 책을 폈다. 모처럼 아늑하게 쉴 수 있는 날 정말 괜찮은 책 한 권은 사랑하는 이와의 데이트만큼이나 설레는 것이니까. 그런데 나의 오산이었다. 이 책은 되게 불편했다. 나의 기분을 완전히 망쳐놨다. 속이 타서 냉수를 들이켜고 빗소리를 들으며 얼음을 씹어댔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맘 편한 대로 살게 된다. 적당히 눈 감고 적당히 흘려듣고 적당히 모른 체 하면서. 먹고사니즘도 빡센데 하나하나 신경 쓰고 살기 솔직히 피곤하잖아. 대충 좋게 좋게 넘기면 겉으로는 무탈한 하루하루니까.
여성으로서의 촉수도 마찬가지다. 대충 더듬이를 숨기면 그럭저럭 살만해 보인다. 비록 내가 오늘도 미니스커트를 입은 죄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뒤를 가리기 바빴고, 오피스텔 앞 담배 피우는 남자가 사라지길 기다리며 부러 편의점에 들렀고, 택시비를 더 얹어주더라도 타다를 잡아타는 그런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말이다. 이 땅 대한민국에서 사는 여자들의 일상적인 그런 건데 뭐.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을 읽으니 무뎌졌던 내 촉수가 아주 예민하고 날카롭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내 친구들이 왜, 우리 엄마가 왜,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처절하다. 작가가 겪었던 스토리는 그냥 허구의 에피소드가 아니다. 그 상황과 대처는 눈물 나게 현실적이고 비참하다.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날 여유조차 없는 절박함. 인격체의 존엄성을 고민할 수 있는 사치는 생존의 위협이 없는 고고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거다. 당장 나를 때려눕혀 강간을 하고 어디 깊은 산속에 데려가 토막을 낼 수 있는 건장한 남성이 차 문을 잠가버렸는데 분노? 자존심? 그런 건 없다. 살아야 하니까. 우리는 이렇게 눈물겹게 살아남는 중이다. 매일매일. 나의 애인은 겪지 않아도 되는 또 다른 삶의 정글에서.
우리는 바꿔야 한다. 나를 위해, 친구와 동료를 위해, 아직 살아계신 나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위해, 그리고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미래의 딸을 위해. 작가는 단 한 톨의 영웅적 서사 없이 오직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의 일상적인 삶을 그려냈지만 그 어떤 투쟁의 깃발보다 선동적이다. 작가의 모든 일기가 모른척하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현실적인 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저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열불이 터지는, 분명 아프고 힘들 수밖에 없는 생채기를 다시 한번 긁어가며 이 글을 꾹꾹 눌러썼을 작가의 마음이 눈물겨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주변의 여성들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나처럼 무뎌졌을, 그러나 똑같이 살아남는 중인 그녀들에게. 우리는 '같이' 살아남아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