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은 시작도 못했는데 홍보담당 경험치는 수직상승중
참으로 우울한 연말이다.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마음이 쓰리다. 과연 이렇게 금융산업 규제가 심한 국내에서 핀테크 사업을 할 수나 있는 걸까? 지금까지 넘어온 관문도 꽤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다시 한번 상품 출시의 좌절을 거치니 맥이 빠진다. 그리고 뭔가 두려워졌다. 앞으로 더 기나긴 가시덤불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어쩌면 영영 못하게 될 수도 있겠구나.
사업이 이렇게 되니 나의 홍보 경험치는 나날이 '강제 렙업'되고 있다. 출시를 못해서 마케팅은 일이 없는데, 금융당국과의 이슈가 많다 보니 내 본업인 홍보/PR은 일이 넘친다. PR의 역할 중 위기관리대응이라고 해야 하나. 기자 친구 말에 따르면 내가 '극한 홍보'를 하고 있다고 한다. 참 씁쓸. 어떤 기자는 전화해서 이렇게 물어보기도 하더라.
매니저님, 운 거 아니죠…?
네 울고 싶네요.
라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정신 나간 듯이 웃으며 대답은 했지만 정말 울고 싶다. 우리 같은 스타트업은 믿을 게 언론뿐이다. 당국 나랏님들은 아무리 건의하고 항의하고 빌고 협박해도 도무지 들어주질 않는다. 그나마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기사를 써주는 언론이 있기에 해볼 만한 싸움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동아줄이 언론인데 내가 언론홍보 매니저라니. 중책을 맡게 된 건 좋은 일인데 분명.... 나 왜 이렇게 스트레스 받는거지?^^ 책임감이 막중하고 정신 없어서 대행사를 나온 후 처음으로 며칠 째 일하는 악몽을 꿨다.
배우는 건 물론 많다. 나는 '일 배울 복'이 터졌는지 친구들은 같은 홍보를 해도 배우는 게 너무 없고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아 이직을 한다는데, 나는 홍보를 한 3년이 내내 스펙타클하다. 대행사 그만두면 좀 평온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역시 사람은 정해진 팔자란게 있나... 울엄마가 나는 개날에 태어나서 평생 바쁘게 살거라더니... (급 사주론) '내가 성장하고 있구나'를 너무 심하게 느끼겠다. 나는 천천히 회전목마도 타고 후룸라이드도 탄 다음에 롤러코스터 타고 싶은데 놀이동산 처음 간 날 등 떠밀려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느낌이랄까. 친구들에게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는 이제 좀 정체되고 싶다^^"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법. 돈 버는 일이 어디든 쉽겠나. 백 프로 만족은 없다는 걸 안다.
한편으론 이제야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이해하겠다. 대기업 홍보직 자소서를 쓰면서 '커뮤니케이션 역량'에 대해 내가 쓴 글이 얼마나 뻘글이었는지도 알겠다.
실무를 해보니 홍보에서 커뮤니케이션이란,
1) 홍보해야 할 대상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고
2) 이해한 바를 토대로 회사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쉽고 명확하게 만들어서
3)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것
인 것 같다. 자소서에는 '친구들 사이에서 소통을 잘했어요' 이런 걸 썼으니 떨어질 수밖에… 쩝…
핵심은 이해력+분석/논리력+글쓰기 실력+ 인간관계 형성 능력이다. 1)번부터 쉽지는 않다. 금융사업이란 게 워낙 복잡하고 용어도 어렵다. 하지만 나 스스로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지 않으면 언론을 설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절대 쉽고 매력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2)번 메시지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항상 회사 내부 사람들과 약간의 충돌(?)이 있다. 대표님은 강조하고 싶은 포인트가 너~무나도 많지만 과한 욕심으로 초점을 흐리는 건 독이다. 또한 회사 사람들은 지극히 우리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홍보 담당자는 항상 그 내용을 반박하고 질문을 던져서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메시지를 만들어 내야 한다.
3)번 효율적인 전달은 미디어 분석 및 관계 구축이 큰 몫을 한다. 평소에 기자 미팅을 하면서 이 기자는 어떤 이슈에 관심이 있는지 성향을 알아두면 기획기사를 피칭할 때 좋다. 기자는 아이템을 얻어서 좋고 나는 기사를 얻어내서 좋고 일석이조다.
뭘 좀 아는 것처럼 써놨지만 사실 나도 배워가는 중이다. 배울 복 터진 내가 또 강제 렙업을 하게 되면 그때 일기장처럼 볼 참이다. "그땐 이런 걸 배웠었구나"하고.
아 근데.. 나 실직하는 거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