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늪에 빠진 것처럼 암울했던 때에 작은 종이와 연필로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를 만들었다.
별다른 도구도 재주도 가질 수 없었던 시절에 연습장과 연필이 잡히는 전부였다.
까맣게 영어단어를 쓰면서 여백을 채운 연습장을 뜯어 정성껏 동그랗게 혹은 거칠게 구긴다.
창가에 볕이 드는 자리 나 스탠드 불빛아래 어디쯤에 자리를 잡아 주고 구겨진 종이의 주름과 명암을 옮기느라 몇 시간씩 집중했는데, 그것은 살아내는 방법을 터득한 나름의 시도였다.
더 구기고 더 어려운 구도를 만들어 두고 스스로를 관찰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신중해지고 고요해지며 침착하게 한 땀 씩 채워가는 나를 보았다.
내 의지를 어떻게 잃지 않는가를 알게 되었고 아무리 좁은 공간에서도 긴 외로움에서도 나를 지킬 수 있게 했다.
결과보다 과정이 힘이고 근육이었다.
그 후로부터는 혼자이거나 알 수 없이 버려진 긴 시간의 두려움은 더 이상 나를 흔들지 못했다.
고흐의 그림을 오르세에서 암스테르담에서 만날 때 느끼던 깊은 적막이 오히려 친근했다.
아를의 강변을 찾아가고 몽마르트르에서 그의 흔적을 찾아보며 걸어보기도 했다.
오베르쉬아즈의 마지막 경로에서 초라하고 작은 그의 하숙방을 만난다.
혹독한 밀밭의 시간을 버티며 살아내고 싶었던 절실한 시간이 느껴진다. 동생과 나란히 누운 묘지로 밝고 따뜻한 햇살이 어우러진다.
의자 하나 해바라기 몇 송이로 그가 자신의 삶을 얼마나 지키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내게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