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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계절의 도피 또는 추방

충분한 고요

by 혜령



세체다를 오르는 케이블카는 오르티세이 마을의 귀퉁이에서 출발한다. 빨간색 사탕상자처럼 생긴 동그란 케이블카가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꾸준히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두 번째 오르는 케이블카는 맑은 창공을 가르며 올라간다. 처음 이 케이블카를 타던 날에는 비가 온 후라 구름을 뚫고 오르는 극적인 경험을 했다. 마을에서부터 걱정을 하며 올랐는데 구름 위로는 차란 하늘이 기다리고 있어 환호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은 케이블카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아기자기한 마을이 자세히 보인다. 문득 드문 드문 한 집들 가운데 하나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제법 높이 오른 고도에 위치한 기울어진 잔디밭에 조용히 앉아 있다. 겨울이 반년인 이곳의 추위 탓에 장작은 집의 크기만큼 쌓아두곤 한다. 눈도 많이 오니 고립되는 일도 자주 있겠다. 폭설이 자주 오는 곳이다 보니 눈을 치우는 일도 큰일이겠다. 그러니 이곳은 겨울 식량이 중요하다. 감자와 말린 과일과 잼이 필수품목이다. 보관이 용이한 절임 식품과 치즈나 버터도 중요한 식량이다. 밀가루를 이용해 신선한 빵을 굽기도 하지만 말린 빵이 많은 이유도 알 수 있겠다. 토마토와 오이도 병조림으로 몇십 통씩 저장해둔다고 한다. 가축을 키운다면 겨울용 건초는 꽤 많은 양이 필요하겠다. 내 시선이 머물던 집은 그리크지 않은 공간에 뒤편으로 장작이 가득 쌓여있고 현관 주변에 나무 식탁이 놓여있는 허름한 집이다. 잠시 나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는 상상을 한다.

뜨거운 차를 만들어 직접 구운 머핀과 함께 들고나가 마시며 책을 읽고 가끔은 빗소리가 듣고 싶어 처마밑에 서 있기도 하겠지.

가끔 식료품점에 갈 수 있는 날이면 자주 마주치는 이웃 한 둘쯤 알고 지네겠다. 급한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고 친절한 미소를 지을 것 같다. 생각보다 도움을 주는데 적극적인 산골 사람들의 인심을 경험한 터라 조금은 기대게 되는 상황도 있겠다. 실로 양말을 짜는 법도 배우고 큼직한 숄도 만들어보고 싶다. 가끔은 아껴둔 김치로 찌개도 끓이고 감자 넣은 수제비도 자주 만들어 먹을 것 같다. 좋은 기회이니 린 책을 읽고 약간은 도망자의 모습으로 말을 아끼며 겨울을 견디어 낼 것이다. 존재와 생물적인 영역에서의 스스로만을 생각하며 주어진 공간에 감사할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어떤 책을 챙겨 올까 목록을 나열해 본다. 지루하고 두꺼운 책이 좋겠다.

이런저런 생각에 케이블카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드넓은 초원과 흰 눈을 이고선 여름의 청명한 경치가 현실로 데려다 놓는다.

눈부신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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