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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두빛초록 Oct 27. 2021

크리스마스엔 공주님이 되고싶어

산타엄마아빠의 선물

'산타할아버지'의 존재를 아직은 믿고있던 시절에
크리스마스는 '설렘 그 자체'였다.


온 거리를 따스한 불빛으로 물들이는 조명과 크리스마스 장식들 사이에 서 있노라면
세상이 나를 포근히 품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마스면 맛있는 음식도 많이먹었다.
엄마가 구워준 부드러운 소고기 스테이크와 곁들인 주황 꽃모양 당근, 달달한 양파, 풍미가득한 버섯들을 맛보면서
역시 야채보단 고기가 최고 맛있지 하면서도 우리집 부엌에서도 가니쉬 덕에 5성급 호텔에 와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먹었던 마요네즈와 설탕을 가득 뿌린 매쉬드포테이토 감자 샐러드와
오뚜기 크림스프도 혀 끝을 간질이는 맛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엔 1년에 한번 갈까 말까 한 피자헛 같은 곳에서 온가족이 외식을 하기도했다.
처음 치즈크러스트의 바삭, 쫀득, 짭짤, 고소한 맛을 본 충격을 잊지 못한다.
직원들이 루돌프 코를 달거나, 산타 모자를 쓰고서 친절하게 웃어줄때면
마쉬멜로우와 사탕들이 가득 붙어있는 달콤한 과자의 집 안에 들어와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이 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에는 더더욱 들떠서 행복했다.
동네 모든 친구들과 밖으로 뛰쳐나와서 눈싸움을 하고,
지칠 때 쯤엔 핫초코로 몸을 데우고선 눈사람을 만들어 전시했다.
그다음날 해가 뜨면 녹는 눈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나는바람에
아주 작은 미니 눈사람을 만들어서 이름을 지어주곤 우리집 냉동실 맨 앞에 넣어주었다.
엄마가 '못산다'라고 했는데 그당시엔 '왜 못산다고 하는지 ?' 이해를 못했다.
내 눈사람 친구를 엄마가 반가워하지않는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크리스마스의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바로
24일날 잠들고난 새벽, 굴뚝으로 들어온 산타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두고 간 선물이었다.
우리집엔 굴뚝이 없는데 어쩌나, 언제나 걱정하면서
동네에 있는 목욕탕 굴뚝으로는 산타할아버지가 들어올 수 있을텐데
내 선물 양말을 목욕탕 탈의실 안에라도 걸어놓아야 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도 했지만
이내 내 방의 작은 창문으로도 들어와 주실거란 강한 믿음으로 머리 맡에 선물양말을 걸기로 타협했다.



그 해엔 정말 정말 받고싶은 선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나는 공주님이 되고싶었다.
어느 장난감 상점에서 봤던 은색 공주님 왕관에는 빨강, 노랑, 분홍, 보라, 파랑 5색의 보석이 한가득 붙어있었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공주님 손거울도 있었고, 틀림없이 내게 비단결같은 공주님 머릿결을 가지게 해줄 빗도 있었다.
아주 당당하게 공주님 드레스를 입고서 손에 들 수 있는  머리부분이 분홍빛 하트무늬 보석이던 공주님 요술봉도 있었다.
머리를 풀고서 흘러내리는 잔머리를 우아하게 틀어올릴 작은 공주님 머리핀까지 있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선물세트가 있으랴...

올해 크리스마스엔 조금 이상하게도 24일 유치원에서 산타할아버지가 직접 오셔서 선물을 나눠준다고 했다.
분명히 산타할아버지는 밤에만 오신다고 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여튼 내 선물을 무사히 가지고만 오신다면
언제 오시든 무슨 상관인가 싶어 낮에 유치원에서 만나는걸 허락하기로 했다.

유치원 강당에 모여앉아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쯤,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지고 강당 문 앞에서 크고 북실북실한 실루엣이 보였다.
키가크고, 안경을 낀, 머리와 수염이 모두 하얀색 양털같이 나있는 산타 할아버지가
빨간색 선물 가방을 한가득 짊어지고 "오호호호하하하하"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였다.
'와, 진짜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다니..!!!' 하는 감격에 눈이 반짝였다.
산타할아버지는 우리 아빠보다도 배가 많이 나온 뚱뚱한 할아버지일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날씬하고 젊어보여서 꽤나 충격적이었다.

젊은 산타아저씨는 강당 가운데 자리를 잡고서, 유치원아이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주며
무릎에 앉히고서 선물을 주고, '진짜 산타와 찍는 인생 최초의 사진'을 남기기 위해 포즈를 잡아주었다.
나도 저 무릎에 앉아서 '산타 할아버지, 진짜 보고싶었어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제 선물은 어디있죠?'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두근두근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나의 차례 !!!
산타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얼굴을 빤히 바라보니 땀이 어찌나 송글송글 맺혔던지
산타할아버지가 너무 힘들어보이는데다가 진짜 산타를 만났다는 설렘때문에
그만 내가 말하려고 했던 말들은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무사히 선물을 받아나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선물을 뜯었는데, 난 분명히 공주님세트를 달라고 기도를했건만
선물상자 속에는 톤다운된 얌전한 분홍색 A라인 모직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고급스럽게 퍼지는 치맛단 끝에는 하얀색으로 다섯 꽃잎이 달린 꽃들이 수놓아져있었다.
분명히 정말정말 예쁜 원피스였다. 마음에 들었다.
아, 근데 갑자기 코가 시큰시큰 간질간질 눈에서 물같은게 떨어졌다.
오늘 이자리엔 공주님 세트가 있었어야 했는데... 이 옷을 입고 공주님세트를 쓰면 얼마나 예쁠까...
서러움에 그만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나를 달래보려 우리 부모님은
'산타 할아버지가 예쁜 옷을 선물해주셨네~ 너무 잘어울린다~ 감사해라~
공주님 세트는 엄마아빠가 사줄게, 아니면 내년 선물로 주실거야~'라고 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25일날 아침, 기적적으로 내 머리맡에는 반짝거리는 포장지로 정성스레 포장된
공주님 장난감 세트가 놓여져있었다.
결국 나의 땡깡에 당한 우리 부모님은 24일 저녁 내가 잠든 뒤 공주님 세트를 사러 마트에 다녀왔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대체 얼마나 공주가 되고싶었으며
얼마나 철이 없었던걸까......
가지고 싶은건 무조건 다 가져야하는 욕심가득한 심보가 어마어마했구나 싶다.

공주님 세트가 아니라서, 그 원피스는 절대절대 안입어!! 하고 발을 마구 땅에 구르던 아이는
소원대로 공주님 왕관을 쓰고서 분홍 원피스까지 예쁘게 차려입고 매일 공주님행차를 하셨다.
그렇게 안입는다고 했으면서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몇년몇개월, 키가 커서 더이상 원피스가 아닌
티셔츠느낌이 날 때 까지 마르고 닳도록 입었다.
철이 들고서 그 날이 어찌나 추억이었는지, 분홍 원피스를 버리는데도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
정말 못산다며 나를 보면서 머리를 꽁하고 쥐어박던 엄마아빠의 손길에서도
사랑이 느껴질만큼 정말 맘에드는 선물이었다.
비록 그 해 이후로 진짜 산타는 엄마아빠였다는 배신감에 조금 시달리긴 했지만
더더욱 구체적으로 받고싶은 선물을 전달할 수 있어 좋아했던 조금은 약은 어린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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