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 위에서 사람들은 평온을 찾는다. 제대로 숨 좀 쉬고 싶어 여기로 왔다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어 이렇게 왔다고들, 각자의 사정들을 가능한 한 간결하게 그러나 절박하게 말하며 매트 위에 앉아 고요함을 찾아나가려 애쓴다.
나는 내 안의 불안정들을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그들의 주의를 몸으로 안내한다.
몸과 마음의 협응.
그것을 단 하루, 단 몇 주, 단 몇 개월 안에 이뤄내기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이렇게 절박하게 안정을 찾고 싶다는 이들에게 그 과정이 꽤나 고될 것이란 것을 미리부터 말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오는 길도 이미 충분히 험난했을 이들에게 또 다른 험준한 길이 있음을 예고하며 힘 빠지게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니까.
다행히 대부분은 매트 위에서 호흡하며 몸을 들여다보는 시간에 곧 사랑에 빠지고 만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그 어설픈 협응의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이 삶에서 유일하게 나를 돌봐주는 시간이기에 그럴 것이다.
이내, 그들의 아픔들이 툭툭 매트 위에서 드러나곤 한다. 나는 가능한 한 당황시키지 않으며 그들을 돕는다. 그것이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도 하다.
대게,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들은 나의 가이드를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다. 엉뚱한 동작을 하고 있거나, 혹은 아예 그 전 동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멈춰있기도 하다. 사실 상관은 없다. 호흡하며 몸만 들여다본다면 그런 동작의 순서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순간 다른 망상이 찾아와 그다음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에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다독거리며 다음 동작으로 이어나갈 수 있도록, 호흡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실은 망상에서 한 걸음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이기도 하다.
살면서 우리가 괜찮지 않은 순간은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전히 하루에도 수차례 감정의 파도를 탄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3분 전에 괜찮았던 내가 그 이후에 불안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한다. 몹시 두려워 도무지 살 수가 없을 것 같다고 되뇌다가도 그다음 순간 기뻐서 깔깔 웃을 때도 있다.
이런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괜찮아?"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괜찮아!"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첫 아이를 낳은 순간, 내가 사람을 낳는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한 순간, 진통을 견뎌내고 마침내 아이의 몸을 내 몸 위에 올려두며 우리의 분리를 경험한 순간. 나는 여전히 낯선, 내가 낳은 생명체에게 처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진심으로 우리가 괜찮길 바랐고, 내가 낳은 이 작은 생명체가 괜찮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의 대부분은 지금 이 순간 괜찮지 않다. 불안하고 고되며 아프다. 좀 더 어렸을 땐, 나만 그런 줄로만 알고 늘 자기연민 속에 허덕였는데, 매트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
왜 우리는 괜찮지 않은 걸까. 괜찮아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내 자신을 치열하게 던지며 살아왔다. 괜찮아지려고 늘 발버둥을 쳤고 매번 실패했지만 그래도 괜찮아지기 위해 또 나아갔다. 직업을 바꾸고 사는 장소를 바꾸고 남들과 다르게 아이를 키워보며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벗어던지기도 해 보았다. 결국은 더 이상 시간을 쪼갤 수 없을 정도로 헐떡이면서도 대학원에 찾아가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다.
그 결과, 깨달은 것은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만든 불안 혹은 우울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어 허덕인다는 것이고 그 불안과 우울이란 결국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망상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망상에서 빠져나와 현재 이 순간의 나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 방법을 훈련해서 익혀야만 한다.
한없이 나약한 우리의 마음들은 아주 가냘픈 자극에도 휘몰아친다. 붕붕 떠다니며 방황하는 그 마음들이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를 수 있도록 , 마음이 현존하는 나의 몸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다독거리는 시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