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라는 감정은 나의 피부만큼이나 익숙하다. 살면서 불안이란 이름의 감정에서 해방되어 본 순간은 거의 손에 꼽을 만하다. 그러다보니 불안이 휘몰아칠 때 도리어 익숙함을 느낄 정도로, 나는 불안과 늘 맞닿아 있었다. 때로는 나 자신과 그 감정이 분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내가 불안을 처음 자각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해질녘만 되면 나는 묘하게 불안감을 느꼈다. 대개 안전한 집 안에서 엄마가 만들어주는 저녁밥 냄새를 맡으며 동생과 노는 평범한 광경 안에 머물렀는데도 불구하고 그 시간은 내게 이상하리만치 불안한 감각을 선사했다. 그 때는 그 감정이 불안이라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목 뒷편이 굳어지며 움츠러들게 되는, 가슴 한 켠이 일렁이는 묘한 신체화 증상에 당황하며 미묘한 감정 안에 우두커니 머물렀다.
만약 나의 가정사가 유난히 불우했거나 기억할 만한 분명한 결핍이 있었다면 나는 내 불안한 감각의 원인을 그 곳에서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봐도 나의 유년 시절은 평범했다. 살면서 남들이 쉽게 겪지 못할 특별한 에피소드들을 겪은 것도 아니고 대체로 안전한 환경에서 성장한 편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 이상한 감정이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오랫동안 찾지 못했고, 지금도 타고난 기질이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기질적으로 나는 다소 예민했고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자라면서 겪는 크고 작은 역경들에 곧잘 긴장했고 그때마다 복통을 느꼈다. 습관처럼 배를 쓰다듬고 있으면 누군가가 "어디 안좋아?"라고 물어보곤 했고, 그제서야 내가 배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곤 했다. 또 스트레스가 찾아오면 이내 장기에 영향을 미쳐 소화가 잘 되지 않았고, 특히 관계 스트레스에 취약해 연인과 이별할 때면 뒷목의 소름이 돋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수주 동안 지속되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감각이나 감정적인 경험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은 거의 없다. 나조차 당혹스러운 경험이라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막연히 짐작했었나보다. 그러다보니 나의 예민과 불안은 대체로 티가 나지 않는 편이긴 했다.
또 나는 사회 안에서 적절하게 적응해왔다. 주변에는 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를 상쇄할만큼의 친밀한 이들이 늘 주변에 있었다. 오랜 시간 우정을 나눈 절친한 친구들과 나를 잘 따라주는 후배들, 그리고 나를 믿어주는 든든한 선배들과 인연을 맺으며 남들처럼 평범하게 삶을 끌어나갔다. 그렇게 적절한 사회화가 이루어졌으니 더더욱 불안이라는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원만한 사회 생활과는 별개로, 내면의 불안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처음 운전을 시작할 무렵의 일이다. 누구나 첫 운전은 긴장되고 특히나 장거리 운전에는 더더욱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했다. 며칠 전부터 네비게이션 지도를 켜고 경로를 한참을 바라보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그래도 운전을 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저울질 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머릿속으로 내가 운전해야 할 길을 시뮬레이션하며 불안을 잠재우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잠들기는 더 힘들어졌다. 운전에 집중해야 하는데 잠을 못 자 멍한 머리로 어떻게 운전을 할까 하는 불안감이 가중되기까지 했다.
물론 내게는 교통사고 트라우마가 있다. 하지만 나의 불안은 운전을 하기 전부터 있었으니 교통사고로 인한 불안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어떤 날에는, 당장 집 문 밖을 나가면 내가 미처 예상할 수 없는 위험들이 닥칠까봐 막연하게 불안하기도 했다. 내 안의 불안은 꽤 오래 전부터 나의 삶의 한 구석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저 남들에게 이 알 수 없는 감정의 기복을 다 드러내지는 않은 채, 그것이 당연한 사회화라고 생각한 채, 그러나 가끔은 나조차 어찌 할 수 없는 불안에 잠식당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묵묵하게 삶을 걸어왔다.
그런 묘한 감각적 경험들을 '불안'이라고 인식하기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마음 공부, 몸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나의 오래된 불안의 감정과 직면하고 있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30년 넘게 피부처럼 붙어 있던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바라보기 시작하자 불안은 정체가 들켜버린 존재처럼 조금씩 다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못 뒷편을 굳게 만들던 감각, 가슴 한 편을 일렁이게 하던 진동이 이제는 내게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