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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배 Feb 15. 2019

28. 엄마도 시간이 필요했나 봐

참 이상하리만치 달랐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는 내내 행복감이 컸다. 내 자궁 속에 어린 생명이 피어나는 모든 과정들이 신비로웠다. 나는 대부분의 과정을 즐겼고, 당시 힘들었던 직장 생활에서 한 달 한 번 초음파를 통해 바라보는 내 아이의 존재는 그 자체로 큰 위안이었다. 나는 내 첫 아이에게 생각보다 많이 의지를 하고 있었다.


아이를 처음 만났던 날은 도무지 잊히지 않는 강렬한 기억이었다. 진통 끝에 마침내 자궁을 벗어나 치골로 미끄러져 나온 나의 아이는 탯줄을 끊어내고 내 품에 소복이 안겼다. 믿기 힘들지만 아기는 엄마 아빠와의 첫 만남에서 고개를 들고 눈까지 동그랗게 떴고, 나는 나중에서야 그게 드문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잠자는 아이에게 여러 번 말해주곤 했다.


“꿀아. 너는 태어나는 순간 고개를 들고 눈을 뜨고 엄마를 봤단다. 엄마는 네가 굉장히 호기심이 많고 굉장히 튼튼한 아이라고 생각했어.”


그 아이가 두 돌이 될 무렵, 나는 예기치 못한 둘째 소식을 접했다. 설렘보다는 걱정이 우선이었다. 걱정은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인지 내 몸에는 오한, 구토, 출혈 등의 반응이 이어졌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는 더 심해졌다. 안정기에 접어들고 나서는 이런 증상들은 다행히 사라졌지만 온 몸의 가려움증과 얼굴에 하나둘씩 피는 여드름 꽃은 진행형이다.


체력적으로 심리적으로 고단한 임신 기간에 육아와 업무까지 겹친 마당에 뱃속 둘째를 따듯하게 감싸주는 온화함은 단 한 번도 발휘되지 못했다. 첫 아이 때는 수시로 배를 쓰다듬으며 아이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곤 했는데 말이다.


한편으로는 ‘에이 어쩔 수 없지 내키지 않은데 억지로 할 건 뭐야’ 했고, 그나마 내 눈에 세상 가장 어여쁜 첫 아이를 쓰다듬는 시간에 찾아오는 심적 안정감이 일종의 태교가 되지 않을까 합리화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17주의 마지막 날. 나는 임산부 요가 수업을 들었다. 자격증 과정이라 임신과 출산에 대한 공부들이 병행되는데, “임신은 축복이며 출산은 축제”라는 선생님의 철학 속에 미끄러지듯 나는 나의 현 상황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매트 위에 올라 명상과 호흡 속에 내 몸을 맡기는데, 들숨과 날숨 사이 나는 내가 혼자가 아니라 뱃속 아이와 함께라는 사실을 온 몬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단 한 번도 아이와 둘이 되었다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첫 아이 임신 때는 둘이 함께라는 생각에 내내 젖어있었는데 말이다.


사실 그럴 여유가 없긴 했다. 혼자 있는 시간 자체가 극히 적으니 말이다.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임을 자각할 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매트 위에서 호흡을 하는 순간, 훅 깨달음이 몰려오듯 나는 지금 내 두 번째 아이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됐다.


나는 서서히 내 마음이 둘째에게도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 아이 때와는 너무 다른 내 자신이 혹시나 편애를 하는 속 좁은 엄마가 되진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서서히 걷혔다. 어쩌면 온전한 나를 들여다볼 여유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마침 그날 즈음부터 내게 발길질을 선사했다. 태동을 느껴본 이들이라면 다 아는 그 귀여운 움직임은 첫 아이와 함께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내가 둘째 아이와도 함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고 작은 발이 닿은 곳을 어루만지며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네 오빠와 함께 있어. 엄마는 네 오빠만큼이나 널 사랑해줄 테니 안심하고 나오렴”이라고 말한다. 이제는 그 감정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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