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뿌리내리기

by 가을장미


그림 한 장을 보았다. 수락산 암벽사이에 소나무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바위 틈새를 비집고 자라느라 심하게 뒤틀려 마치 몇 마리 용들이 뒤엉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듯했다. 바탕의 바윗색을 단순하고 흐리게 표현해 소나무의 생생함이 도드라졌다. 역동적인 나뭇가지 방향과 가지 끝에 달린 솔잎의 섬세한 표현이 대조를 이루었다. 마치 내가 등산길에서 암벽 사이로 뻗어나온 소나무를 올려다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척박한 곳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자랄 수 있었을까.

이 소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니 요즘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미나리’가 다시 생각났다. 미국으로 이민 간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아메리칸드림을 갖고 도착한 미국에서 감독의 아버지는 병아리 감별사를 하면서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자식을 키우고 가정을 이루어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야기였다. 영화에서는 멋진 성공이야기가 보이진 않지만, 뭔가 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아버지의 야망이 좌절되는 여러 상황을 담아낸다. 그러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고 천천히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다. 좀 더디 가더라도 돈보다는 가족이 함께 하면서 살아내는 것이 제대로 뿌리내리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정 감독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만든 이 영화가 미국과 세계에서 통하는 것은 한국적인 특수성도 있지만 이민자로 구성된 미국인에겐 너무나 보편적인 주제이기에 공감이 크다고 한다.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정착하기 위해 애쓴 험난한 이민사가 바로 그들의 ‘미나리’이기도 했기에. 미나리처럼 물만 있으면 어디서나 잘 적응해서 살고 있는 재미교포들, 올해 아카데미 수상의 기쁜 소식이 날아들기를.

영화 ‘미나리’가 미국의 이민자를 다뤘다면, 일본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는 재일동포의 삶을 다루는 책이 있다. ‘파친코‘라는 소설이다. 이민진 작가도 미국 이민 1.5세대로 그녀의 소설적 뿌리 역시 전쟁을 겪은 부모님으로부터 이어지는 가족의 이민사가 소재였다.그녀는 일요일도 없이 일했던 부모님의 뒷바라지 덕분에 기업 변호사가 되어 한인 이민 사회의 성공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지면서부터 고교시절에 재능을 보였던 작가의 길로 들어섰단다.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다가 자살한 어느 일본 중학생의 기사를 보고 이 책을 오랜시간 집필했다고 한다. 소설의 줄거리처럼 그녀의 아버지는 원산, 엄마는 부산출신이고 자신은 코리안 어메리칸, 남편은 일본계 미국인이다. 역사학을 공부했기에 그녀의 복잡한 가족사가 소설의 뿌리가 되었으리라.

이 소설은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재일 동포의 아픔을 담고 있었다. 주인공들은 4대째 일본에서 살고있지만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는 자이니치(조선인), 이방인으로 그들은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삶의 굴레를 지고 간다. 아들에서 손자까지 일본에서 살았지만 3년마다 지문과 등록증을 해야 했고 조선의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일자리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래서 제목처럼 등장인물들은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다. 야쿠자와의 연관성 때문에 폭력적이고 제일 비열한 직업으로 여겨졌지만 돈과 권력과 신분상승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이민자와 달리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 재일 교포들은 더 험난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왔다. 가장 힘든 밑바닥 일들을 하면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 지키기위해 살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힘든 세월의 뿌리를 찾아간다. 소설의 인물들은 일본에서 가혹한 차별과 가난을 견디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관한 의문과 끊임없이 마주한다. 이민진 작가 자신이 이민자의 아픔을 경험했기에 이런 생생한 작품을 쓸 수 있었으리라. 민감한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작품화한 그녀의 용기와 집념에 박수를 보낸다. 많은 자료수집과 생생한 인물묘사와 시대상을 잘 표현하고 인물 하나하나 각자의 특징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서 와 닿았다.

자국에서 살아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타국에 정착하며 살기엔 얼마나 많은 용기와 아픔이 필요했을까. 막연히 알고 있었던 재일교포들의 역사적인 아픔을 다루는 좋은 소설을 통해 몰랐던 부분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에는 많은 인생이 녹아있고 디아스포라의 지난한 삶이 들어있다. 모국에서 차별 없이 살다 보니 이민자의 삶에 대해 무지하고 무심했던 나를 깨우쳐 주었다. 작가의 섬세한 마음의 결을 따라가다 보니 두꺼운 두 권의 책이 금방 넘어갔다.

다시, 내가 보던 그림 속으로 몰입해 본다. 이 그림을 보면서 인생은 바로 이 소나무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뿌리내리기가 아닐까. 세파의 힘든 뒤척임이 소나무 그림에서 느껴진다. 바로 뿌리가 튼튼한 소나무가 되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듯이.

지금 나도 인생 이모작을 하고 있다. 글을 쓰면서 지난 삶을 돌아보고, 뭔가를 쓰기 위해 책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그동안 생각 없이 달리며 살았던 시간들을 자성하며 깊게 들여다본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마음에 조금씩 공감의 뿌리가 내려갈 때, 결국 나의 세계도 넓어지리라. 내 모습을 그들의 글에 비추어 보며 제대로 살았는지,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기에. 글쓰기 습관이 제대로 뿌리내리려면, 지금부터 더 치열하게 많은 시간과 사색이 필요하겠다. 꾸준히 쓰다 보면 글이 나를 조금씩 성장과 성숙으로 이끌어 줄 테니까.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홀로 생각한다. 그런데, 나만의 뿌리내리기는 어디쯤일까.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리며 문장을 썼다가 지운다. 지금의 나를 다시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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