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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Jun 12. 2021

싸구려 커피가 선사한 최고 힐링장소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그곳, D관 테라스.

사진=포스퀘어 유저 Kim W.

2019년 추석 연휴 때 SBS에서 호기심을 끌만한 파일럿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국내최초 버라이어티 메디컬 다큐 정보 사이언스 쇼'라고 내건 '신동엽 VS 김상중, 술이 더 해로운가 담배가 더 해로운가'. 둘 다 인간에게 해로운데 누가 더 낫냐고 배틀한다니.


신동엽과 김상중이 각각 애주가와 애연가 대표로 나와 자기 견해를 고수하면서 동시에 술과 담배의 위해성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단순히 술 담배의 위해만 다루기보단 애주가와 애연가 중 90세 이상 장수하신 분을 인터뷰하는가 하면, 흡연과 음주를 모두 해온 네 쌍의 쌍둥이를 모집해 한쪽은 금연 다른 쪽은 금주를 한 뒤 신체 조건 및 표본 검사를 진행했다. 이어지는 2부에선 국내와 해외 인터뷰를 통해 직장·연애 등에 술 담배가 미치는 영향 및 미래에 변화할 방양도 살펴봤다.


지상파에서 음주와 흡연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꺼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러나 크게 와닿거나 과몰입할 정도는 아니었다. 술 담배와는 다소 거리가 멀어서였을까. 태어날 때부터 비흡연자를 고수하고 있고, 술은 특별한 경우나 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딱히 찾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중독될 염려도 없고, 집착할 필요도 없다. 반려자 조건에서 중요하다는 '술 담배 안 하는 사람' 여깄어요.


대신, 카페인에 환장한다. 카페인(특히 커피랑 차) 섭취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직장인이 된 후로는 매일 피곤과 스트레스에 찌들어 살게 됐다. 몸이 개운하다거나 펄펄 날 것처럼 가볍다고 느낀지도 너무나 오래됐다. 고됨 속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면 내면에 쌓이고 뭉쳐있던 덩어리들이 짓누르는 무게를 잠시나마 잊어버리면서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느낌을 받는다. 여기에 자양강장제, 기력회복제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커피로 '식후땡'을 하는 건 루틴이자 일상의 일부가 됐다. 나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커피가 기호식품이라는 말도 이제는 바꿔야 하지 않을까.


카페인과의 역사는 제법 오래됐다. 유년기 때는 레쓰비 같은 캔커피나 더위사냥 같은 커피맛 아이스크림 등을 좋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카페인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돈 아니었다. 제대로 된 '커피'를 맛본 경험은 아마 고등학생 때부터였던 것 같다.


좋은 햇살이 내려쬐는 봄 오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입시학원을 가는 길이었고, 여유가 있어 입이 심심해 요깃거리를 찾던 중이었다. 때마침 홈플러스 건너편 상가에 있던 던킨도너츠가 레이더망에 잡혔다. 도넛 여러 개를 사려고 호주머니를 털었더니 겨우 2천 원. 기껏 해봐야 도넛 하나 정도밖에 살 수 없었다. 가격대에 맞춰 고를 수 있는 메뉴 중 아메리카노가 유일했다. 전재산 지폐 두 장을 건넸다. 


첫 모금은 "뜨겁고 너무 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존재도 모르면서 뭣도 모르고 뜨거운 걸 주문한 내가 잘못이지. 두 번째 모금에선 "이걸 돈 주고 왜 마시나". 커피 원두의 맛을 모르는 고등학생이 음미하기엔 쓸 고 그 자체였다. 짐 자무쉬의 '커피와 담배' 속 등장인물들처럼 커피의 참된 맛을 깨닫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 걸리긴 했다만.


돈이 없었던 20대 초중반에는 카페보다 자판기가 직접 내린 커피도 자주 애용했다. 장기하의 노래 제목처럼 '싸구려'이긴 하다만, 메이드 인 자판기산 특유의 인공적 단짠단짠은 혀를 만족시키기 충분했다. 동전 두세 푼으로 누릴 수 있는 가성비 최대치 아닌가. 밤낮 구분 없이 각종 서적 및 유인물들과 씨름하며 교내 도서관, 독서실에 붙어있어야만 했던 시험기간엔 24시간 언제나 두 팔 벌려 반겨주는 안식처였다.


대학교 다닐 적에는 D관 테라스에 비치된 자판기 커피가 최애였다. D관 독서실에서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근사한 전경을 담은 테라스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새 건물이 전방에 자리 잡고 있어 시야를 해치고 있었으나, 라떼 시절에는 테라스 앞으로는 고층 건물들이 없어 한강도 감상할 수도 있었다. 매년 10월마다 열리는 서울불꽃축제도 미어터지는 한강공원에 가지 않고 여기 테라스에서 운치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동편으로는 언덕에 오밀조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택들이 보였다. 비록 원거리라 사람들까지 보이지 않으나 밀집된 주택들을 바라보며 저들의 삶은 어떨까 상상해봤다. 집들로 빽빽한 언덕 너머엔 희미하게 남산타워가 드러났다. 야간에는 남산타워에서 뿜어내는 불빛도 선명하게 관찰할 수 있다. 답답하고 숨 막히는 독서실 공기와 전공서적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소소한 힐링의 장소였다. 그러면서 자판기에서 뽑은 밀크커피 한 잔이 그렇게 맛났다. 그때 맛은 루왁커피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급지고 독보적이었다.


D관 테라스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싸구려 커피를 마실 때마다 잡념에 빠지곤 했다. 내가 거쳐온 길을 뒤돌아보며 잘한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걸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흘러갈까 등을 생각했다. 불안정한 20대의 초상이었다. 그러다 멍 때리면서 테라스 전경을 찬찬히 바라봤다. 이어 밀크커피 한 모금 마시면서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방해꾼들을 싹 날려버렸다. 


종종 D관 테라스에서 커피 혹은 커담(커피+담배)를 하러 나온 선·후배 동기들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시시콜콜하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때 나눴던 대화들이 그렇게 즐겁고 재밌었다. 테라스에서 함께 싸구려 커피를 마셨던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하다.


어김없이 밥을 먹고 나만의 '식후땡'을 즐기러 커피를 사러 나간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출근보다 재택근무가 많아졌다. 그래서 집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콜드브루를 사서 돌아온다. 환경 보호하자는 입장에서 일회용 컵을 쓰지 않으려고 항상 텀블러를 챙긴다. 추출된 원두의 맛을 청량하고 깔끔한 목 넘김으로 즐길 수 있고, 온기가 식길 기다릴 필요도 없어서 편하다. 그래서 콜드브루를 선호한다. 그러나 가끔 D관 테라스에서 마셨던 짭짤하면서 달달했던 싸구려 커피맛이 그립다. 그때 그 순간을 다시 한번 만끽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지금 다시 가면 그 맛, 그 기분을 느낄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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