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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Jun 26. 2021

11살 나에게 전하는 진지한 한마디

11살 너, 중요한 말이야. 잘 들어.


대학교 입학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3월 X일 초저녁, D관 지하 1층 102호. 나를 포함한 수많은 동기들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평소였다면 집에 갔거나 아니면 애들과 술 먹으러 갔을 시각이다. 이날은 과 선배들이 활동하는 학회 소개가 예정되어 있어 모두 102호로 운집했다.


과 내 학회는 3개 있었다. 두 개는 전공과 맞물려있는 형사법학회와 첫출발을 알린 인권법학회. 나머지 하나는 밴드가 있는 문예단. 문예단 소속 선배들은 갓 입학한 후배들에게 어필하려고 밴드 합주를 선보였다. 여러 곡을 합주하는 걸 구경하면서 두 눈은 보컬보단 악기들로 향했다. 드럼, 베이스, 일렉 기타, 건반... 저기서 함께 하고 싶은 욕구가 잠시 샘솟았다가 사그라들었다.


과방을 방문하면 가끔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연습했다. 그러다 인원이 어느 정도 갖춰졌다 싶으면 즉흥 합주도 해보고, 누군가 악기에 호기심을 가지면 눈을 반짝거리며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때 건반이 슬쩍슬쩍 눈이 갔다. 한 번 만져볼까 생각하다가도 뻗은 손을 금세 거뒀다. 내가 건반을 애처롭게 쓰다듬기만 하니 한 선배가 눈치를 챘는지 "너 한 번 배워볼래?"라고 넌지시 물었다. 이에 "아니요, 괜찮아요"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 선배는 자기가 성심성의껏 가르쳐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배는 나를 초보자로 생각하는 듯했다. 선배의 생각과 달리 건반 칠 줄 알고 악보도 볼 줄 안다. 어렸을 때 꽤나 피아노를 가지고 놀았다.


피아노와 친해지게 된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집에 갈색 원목 피아노가 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외가댁에서 가지고 왔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장난감 가지고 놀듯, 피아노 건반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뚱땅뚱땅 치면서 놀았다. 음정, 박자 전혀 몰랐지만, 소리 나는 물체가 꼬마한테는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셨는지, 어머니는 아들이 다양한 재능을 키워보려는 큰 그림으로 피아노 학원에 나를 보냈다. 6살짜리 눈에 피아노 학원은 신세계였다. 16개 되는 방마다 피아노가 하나씩 비치되어 있다니! 학원 원장이 부잣집인가 보다. 똑딱똑딱 추가 좌우로 움직이는 메트로놈도 재밌었다. 첫날 나는 피아노 교재 여러 권을 받았고, 음이름부터 화음, 각종 음표 등 악보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피아노 배우는 속도도 같은 또래 애들에 비해 빠른 편이었다. 초보자용 교재를 뗀 뒤, 바이엘 건너뛰고 곧바로 체르니 100번과 하농으로 넘어갔다. 손가락 움직임과 테크닉이 많이 요구되는 수준이라 종종 고무고무 열매를 먹은 것처럼 건반을 치는 내내 손가락이 쭉쭉 찢어지고 늘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나, 재밌었다. 아마도 다른 애들보다 진도가 월등히 앞서고 있다는 우월감과 성취감, 피아노가 주는 재미가 적절하게 섞인 덕분이었다.



10살 때, 생애 첫 어린이 피아노 대회를 나갔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대회 당일 아침 일찍 피아노 학원에 방문, 손 풀기 한다고 1시간 동안 체르니 30과 연주곡인 모차르트 곡 하나를 쉴 새 없이 쳤다. 내 손가락은 호나우지뉴의 드리블보다도 더 현란했다. 비록 대상, 금상보다 낮은 특상을 받았으나, 충분히 만족했다. 어린 나이에 교외 대회 나가서 최초로 입상을 했으니까.


그러나 대회를 다녀온 후, 피아노에 대한 흥미가 꺾였다. 연차가 점점 쌓이면서 연습해야 할 곡들의 난이도가 어려워지기만 하니 여기에 대해 크게 싫증을 느꼈던 것 같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 위대한 거장들이 작곡한 곡들을 11살짜리가 매일 연습하기엔 따분하고 지루했다. 클래식의 매력을 딱히 느끼지 못했던 것도 컸다. 그래서 연습방에 들어가 건반을 치기보단 멍 때리거나 딴짓하고, 눈치 보면서 자기 일쑤였다.


또 다른 이유를 찾아보자면, 외로움과 고독함이었다. 나이를 먹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 또래 아이들 중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건 나 혼자였다. 당시 남자아이들은 온몸을 다 바칠 만큼 운동에 목숨 걸었다. 학원에 구애받지 않고 해 질 때까지 뛰어놀았던데 반해, 나는 각종 학원에 발이 묶여있었다. 장기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여러 학원을 다니며 배웠던 것들이 교양지식을 쌓는데 도움되긴 했으나, 그때는 너무나 싫었다. 그래서 연습방보단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망만 자랐다.


결국 11살 이후로 더 이상 피아노 의자에 앉질 않았다. 유일하게 집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레 집 안 공간을 떡하니 차지하던 피아노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결국 중학교 졸업할 때쯤 옆동네 사는 육촌에게 넘겼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 대학교 와서 다시 피아노 생각이 났다. 그때 선배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어도 됐는데, 그러질 못했다. 비겁한 변명이긴 한데, 다시 시작할 자신이 없었고 모차르트, 베토벤에 시달렸던 기억들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피해버렸다.


요즘엔 피아노   안다고 밝히면,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그러면서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멋있게 봐주기도 한다. 이걸 11  미리 알았더라면, 중도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그리고 대학교 가서도 밴드 일원으로도 합류할 뻔도 했는데. 네가 잘못했어!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중도에 위기가 오더라도 하차하지 마시길. 언젠가 꾸준히 팠던 우물 자리에, 물이 나오니 계속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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