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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Oct 02. 2023

이미 실화 자체가 영화인데 말이죠

영화 '1947 보스톤' 리뷰

오랜 시간이 걸려 마침내 관객들에게 공개된 영화 '1947 보스톤', 개봉하기까지 견뎌내며 꿋꿋하게 달려왔지만 영화는 '글쎄다'. 이미 실화 자체가 영화인데 이를 뛰어넘기엔, 혹은 이에 비견될 여운이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영화로 탄생했어야 했는지도 의문이다.


강제규 감독의 '1947 보스톤'은 1947년에 열린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서윤복 선수가 금메달을 땄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당시 대회에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였던 손기정 선수가 감독으로, 같은 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가 코치 겸 선수로 동행했다.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 세 마라토너의 이야기는 이미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다. 나라 잃은 국민들의 설움을 달래준 국민영웅, 광복 후 태극기를 달고 세계 무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차세대 영웅이지 않나. 확연히 드러난 역사인데 영화는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일부 픽션을 덧붙이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서 강제규 감독은 '1947 보스톤'을 통해 근현대사의 비극을 물려받은 국내 관객들의 유전자를 자극한다. 대표적인 예가 손기정(하정우)의 보스턴 기자회견 장면이다. 허구로 만든 이 장면으로 보는 이들의 눈물을 착즙 한다. 일제강점기에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 숙였던 조선인 영웅의 안타까운 선수생활기와 국뽕을 적절히 결합시킨 게 눈에 보인다.



손기정을 더욱 극적으로 재구성하여 표현하다 보니 또 다른 주요 인물 서윤복(임시완) 캐릭터에 대한 재구성이 상대적으로 부실했다. 온갖 역경을 딛고 보스턴에 도착해 태극기를 달고 금메달을 따내는 과정 속에서 서윤복이 달려야 하는 원동력(어머니의 죽음, 손기정을 향한 존경 등)이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결국 국뽕에 이용된 꼴이랄까. 단순히 배성우의 음주운전 사건 여파로 인한 강제적 편집 때문에 영화의 매력이 반감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또 '1947 보스톤'은 강제규 감독의 전성기였던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에 내놓은 작품들 스타일과 닮아 보인다. 당시 강제규 감독은 대표작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한국전쟁에 휘말린 형제의 운명을 그리면서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녹여내 주목받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한국 근현대사를 다루는 방식이 그에 걸맞게 변화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20년 전에 머물며 정체됨을 인증했다.


스포츠 영화로서 접근하기에도 상당히 아쉽다. 다른 스포츠 종목들에 비해 정적인 마라톤 경기를 역동적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한 흔적은 보이지만 마라톤 팀의 기록이나 성취를 집념, 의지로만 표현했다는 게 문제. 훈련 장면 또한 열심히 뛰는 것 말고는 딱히 표현할 방법도 없어 보인다. 그래서 스포츠 종목 관람하는 것만큼 몰입도를 주지 못한다.


실화보다 극적이거나 영화처럼 다가오진 않지만 '1947 보스톤'의 출연 배우들의 연기력은 인정할 부분이다. 하정우는 특유의 쿨함과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불 같은 매력으로 손기정을 표현해 냈고, 임시완은 외적인 면에서부터 서윤복으로 변신한 듯한 아우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남승룡 역을 맡은 배성우 또한 두 캐릭터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맡으며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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