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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Hyun Jun 01. 2021

이게 다 하정우 때문이야

하정우에게 영업당해 30대에 '걷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2017년 12월 어느 날, 하정우 '신과함께-죄와벌' 매체 인터뷰가 있는 날.


이날 인터뷰 후반부쯤 "평소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당시 하정우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여행, 그리고 걷기를 꼽았다. 이때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걷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얼마 전에 'PMC' 촬영이 끝나고 열흘간 휴가가 생겼을 때, 한 달처럼 써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제일 먼저 핸드폰을 두고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그곳 풍경을 보며 많이 걸었다. 하루에 10시간씩 4~5만 보 정도 걸었고, 세어보니 260km더라. 휴가 이후 본격적인 영화 홍보 일정을 소화해야 했기에 걸으면서 2년간 내가 참여했던 작품들에 대해 하나하나 떠올리며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점을 말할까 하나하나 정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영감을 얻곤 한다." -하정우-


그러면서 영화 '577프로젝트' 찍을 때 일화를 털어놨다. 대장정을 다녀온 뒤 안정된 기분을 느꼈다면서 그때부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해 끼워 맞췄고, 지금은 만보기를 휴대하면서 걷고 있다고. 당시 나는 그의 발언을 기계처럼 받아들이고 단순히 기사에 녹여내는 데에만 집중했고, 오랫동안 잊어버렸다. 이후 하정우는 직접 집필한 에세이 '걷는 사람, 하정우'와 유튜브 채널 '걷기학교'를 통해 꾸준히 걷기의 장점을 알리며 걷기홍보대사를 자처했다. 그때도 "취미생활 열심히 하나 보다" 식으로 넘겼다.


2019년 10월, '현대카드 다빈치모텔' 토크 세션을 통해 하정우의 걷기 이야기를 또 듣게 됐다. 그때 '매일 6시간 3만 보' 목표라는 그는 촬영할 때에도 틈틈이 짬 내서 걷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걷기로 20대 시절 두려움과 걱정도 이겨냈다고 고백했다.

"컴컴한 앞날을 받아들이는 그 기분이 너무 싫었다. 스스로 위축되게 만들고 오디션 현장만 가면 절실해지는 나 자신이 싫었다. 걷다 보니 마음을 다잡았고, 뭔가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가 조언하면,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이걸 유지하기 위해 걷는다." -하정우-

또 한 번 걷기의 중요성 및 장점을 역설하고 있었음에도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해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까진 말이다.


2019년 12월, 회사 사무실. 평소 퇴근 시각보다 약 한 시간 늦게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 나를 제외한 다른 이들은 일찌감치 떠난 상태. 모든 불을 다 끄고, 문단속을 하고 나오던 중 회사 테라스 너머 풍경을 바라봤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빌딩들이 내는 불빛들이 따뜻하고 화려했다. 건물 아래에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렸다. 분명 즐거운 분위기였으나 회의감이 몰려왔다. 당시 일이 한창 몰렸을 때였고 번아웃으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심신으로 지쳤던 시절이었다. 테라스 난관을 붙잡고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라며 크게 한숨 쉬었다. 그러면서 약간의 두통과 가슴이 답답해지는 걸 느꼈다.


나를 조여 오는 압박감을 해소하고픈 마음에 이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압구정로데오에서 신논현까지 무작정 걸었다. 신사동 고개를 지나갔는데, 이 구간이 매우 살벌했다. 제법 경사가 있어 숨이 가빠오는데, 초겨울 매서운 칼바람이 내리막길을 타고 내 가슴팍을 직격으로 계속 찔러댔다. '내가 왜 걷고 있는 거지', '지금이라도 버스를 탈까' 등 고지에 다다르기 전까지 계속 고민했다. 달리기도 사점(dead point)이 지나면 몸이 가뿐해지고 오르가슴과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있듯, 신사동 고개를 지나가는 순간부터 러너스 하이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걷는 게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통과 답답함도 어느새 사라졌다. 이게 하정우가 말하는 걷기의 효능인가? 나도 그동안 많이 걸어봤다고 자부했던 사람인데, 이전에는 체감할 수 없었던 기운들이 밀려왔다. 육체와 정신이 한층 가벼웠고 맑아졌다.


이 개운함과 홀가분함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그 후로 평일 퇴근길, 주말엔 동네 한 바퀴 등을 돌며 꾸준히 걷기 시작했다. 여건상 3만 보는 힘들기에 하루 최소 1만 보 이상을 걸어보자는 나름대로 목표를 설정했다. 도중에 코로나 19가 닥쳐 창궐했을 때에는 개인 방역을 철저히 지키면서 이어갔다.


건강에 신경 써야 하는 30대였고 걷기에 더욱 진심으로 다가가려고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들이밀며 애플 워치를 충동구매했다. 지금 다양한 기능들을 쏠쏠하게 활용하고 있긴 하나, 주요 사용하는 기능은 피트니스와 운동 앱. 꾸준히 하루하루 운동량을 체크하며 나의 데이터를 아이폰에 기록하고 있다. 단점이 있다면, 의무적으로 애플워치를 착용하고 운동하고 하루 일상을 지내는 습관이 몸에 배면서 워치가 일종의 족쇄같이 되어버렸다는 것? 쉬어도 괜찮을 법한데도 잠시라도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어선 안될 것 같은 불안감을 가끔 느끼곤 한다.



불안감과 의무를 대변하는 게 피트니스 앱이 매달 나에게 부여하는 월별 미션이었다. 2월 한 달간 총 230.2km를, 5월에는 누적 257km를 채워야 했다. 특히 2월 미션을 잊지 못한다. 2월 27일 기준으로 미션을 성공하려면 28일 하루 동안 17.5km를 걸어야만 했다.


다행히 그날 휴무였던지라, 단순히 '동네를 크게 한 바퀴 돌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대장정에 올랐다. 약 3시간 동안 파워워킹으로 17.7km를 소화하며 끝내 미션을 달성했다. 의무감과 승부욕의 결과물이었던 셈. 두 발바닥이 살짝 얼얼하긴 했으나, 뿌듯했다. 성취감도 있었고, 걷고 난 뒤 머릿속 잡념들을 비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면서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동네의 변화하는 모습도 순간순간 만날 수 있었다. 5월 미션 또한 2월 때처럼 크게 동네 한 바퀴를 완주한 게 영향을 끼쳐, 좀 더 빨리 목표 달성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열심히 걷는 사람 현재 진행형이다. 가끔 지인들을 만나면, 틈틈이 짬을 내 꾸준히 걷는다고 자랑하면서 "너도 한 번 걸어봐"라고 추천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이렇게 된 건, 모두 하정우 탓이다. 하정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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