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 동화 공모전 <성냥팔이 소녀>
잿빛 흐린 하늘은 금세 검은색으로 변했다. 거리 상점들의 간판은 하나 둘 켜졌고, 그 앞의 가로등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을 밝히고 있었다. 지하철 입구에서는 퇴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으로 소란스러웠고, 때맞춰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재촉했다.
누군가는 머리에 손을 올리고 뛰어가고, 누군가는 하늘을 쳐다보다가 편의점에 들어갔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고개를 내리 깐 채 골목길로 들어섰다. 몇 발자국 움직이자, 자동차 바퀴와 바닥의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 가게 문을 여닫는 소리, 집에 거의 다 왔다고 누군가에게 전화하는 소리들이 온데 섞여 서서히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어두 컴컴한 골목길을 비추는 불빛이라고는 가로등 불빛밖에 없었고,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바닥에 수북이 쌓인 낙엽 위로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낙엽들 위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애써 입을 앙 다물며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봐도 한 번 터진 울음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귓가에서는 조금 전에 집주인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월세를 안내는 거야."
"지 아빠 닮아서 사람 말 더럽게 무시하네."
"나도 월세를 받아야 은행 이자를 내고 하지, 학생! 나 너무 미워하지 마. 나도 힘들어서 이러는 거야."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 같이 계속 반복되는 소리에 그만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건물 뒤에 숨어 있는 각진 하늘은 아무 말없이 계속 빗방울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나는 하늘에 대고 말했다.
"나한테 왜 이래..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이사 온 뒤 한 번도 월세를 받은 적 없다는 집주인도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빠도 원망할 수 없어서 나는 그냥 죄 없는 하늘만 원망했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느냐고,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느냐고,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답도 하지 않는 하늘에 대고 나는 하염없이 원망만 늘어놨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 내 옆에는 가로등의 노란빛과 빗물에 젖은 낙엽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불빛에 반짝거리는 낙엽을 멍하니 바라보다 속절없이 예쁘다고 생각한 내가 너무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헛웃음을 치다 나는 일어나서 아빠에게 갔다.
그날, 날 위로한 건 그저 가만히 쌓여있던, 눈치 없이 아름답기만 하던 낙엽이었다.
누구나 절망의 순간이 있다. 온몸이 거미줄에 감긴 것 같이 답답하고, 도대체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무나 붙잡고 이유라도 묻고 싶은 순간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지금 이 순간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절망의 순간에 나를 위로한 건 갑자기 나타나서 악마를 때려눕히는 영웅이 아닌 그저 한 낱 낙엽이었다. 평소에 예쁘다고 생각했던 적은 물론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던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낙엽이 어째서 그 순간 내게 위로가 되었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 그날의 낙엽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자리를 지켰다. 아무도 없는 그 골목에서 웅크리고 있는 내 옆에 그저 가만히.
성냥팔이 소녀가 꺼질 줄 알면서도 성냥을 계속해서 켠 이유는 성냥의 불빛이 켜져 있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 느끼기 때문이었다. 성냥이 켜져 있는 순간에는 추위에 꽁꽁 언 몸으로 두 집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 옆에 따뜻한 난로도 있었고 등에 포크를 꼽고 돌아다니는 거위도 있었고, 누구보다 사랑하는 할머니도 함께 있었다. 성냥이 꺼지기 전까지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인간은 이 세상에 혼자라고 느껴질 때 가장 절망하는지도 모르겠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절망의 순간에 인간은 성냥을 켜서라도 혹은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낙엽을 통해서든 자신과 함께 해 줄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을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성냥팔이 소녀에게 성냥 같은 사람, 그날의 골목길에서 낙엽 같은 사람이 되면 된다. 그저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 그저 가만히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 그것만으로도 당신의 따뜻한 온기가 그 사람에게 전해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