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꽃에 대한 애도
지난 주 좋아하는 분한테서 꽃다발을 선물받았다.
정확하게 말해 택배로 받았다. 꽃다발을 받은 것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지만, 택배로 받은 것은 처음이다.
꽃말이 꼭 오고야말 행복. 그 꽃말에 뻑이 가서 ‘이건 보내야 돼’ 하면서 보내셨단다.
누군가 나의 행복을 이렇게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건 목이 메도록 고마운 일. 나름 ‘행복이 별 건가, 하루하루 만족하면서 사는 거지’라며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별스럽게 눈물샘이 툭 터져버렸다. 다 몹쓸 갱춘기 탓이다.
오고야 말 행복이 어서 당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스레 물을 준 꽃이 일주일 만에 시들었다. 생기 있던 노란색 꽃잎은 누래지고, 기운차게 뻗어있던 잎사귀들은 삶은 시금치마냥 축 늘어졌다. 누추하고 초라하다. 이제 버려야겠구나 하면서 뽑았는데 어쩐지 꽃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뭐라고 처량하게 감정 이입을 하고 있는 나.
젊었을 때 꽤 예뻤던 친구를 간만에 만난 적이 있다. 그 친구도 세월의 흔적은 비껴갈 순 없었지만 여전히 예뻤다. 그래도 그 친구의 주름과 흰머리를 보면서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예뻐도 평범해도 못나도 늙는 데에는 공평하다는 사실이.
누구에게든 늙음과 시듦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프고 쓸쓸한 일이다.
그래서 제 계절에 맞게 산다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젊고 화사하게 꽃 피는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
그때도 그 계절을 온전히 사랑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꽃이 떨어지고 잎도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한 철,
모든 것을 다 떨궈낸 헐벗은 그 한 철도 사랑해 줘야 하지 않을까.
그 사랑이 결국은 오랫동안 이어지는 삶의 골목골목에 행복을 오고야 말게 하는 힘 아닐까.
행복은 오고야 만다는 꽃말을 품은 채 시든 꽃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하는 쓸쓸한 위로.
에피톤 프로젝트 <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